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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38)

by 김형효 2012. 12. 29.

밖을 향해 걸을 때 안의 문이 열린다

 

 

어린 임금(?) 로한이 기자를 잘 따르는 덕으로 머니라이 일가와 더욱 친근한 관계가 되었다. 덕분에 어린 임금의 소변을 여러 차례 선물로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 동안 머니라이 집에 머물렀다.

어릴 때 고향에서 어른들이 하던 말이다. 조카나 아주 어린 애기들을 안고 있을 때 아기들이 대·소변을 보게 되면 선물 받았다고 말이다. 덕분에 나도 로한의 선물을 받아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모두 어린 날 잘 받은 가정교육(?) 덕분이다.

머니라이의 아내는 그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어린 시절 고향 어른들 말이라면서 선물이라고 하면 겸연쩍게 웃고는 했다. 머니라이도 물론이다.
하루 하루 나이테의 길이를 더할수록 내가 참으로 사람 욕심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어쩌면 더 많은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한국에서 내 아우나 형제에게 그리고 또 다른 지인들에게 쉽게 하지 못하던 말도 예전 한국에서 하던 가족처럼 말할 수 있다. 이방인 네팔에서 말이다.

“머니라이,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손님이 왔어! 밥 좀 부탁해! 간단하게 솔로쿰부 혹은 네팔 전통음식으로 말야!” 군말 없이 준비해준 그가 고맙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은 내가 네팔에 머물게 되는 이유다. 수많은 노래 속에 형제와 사랑 그리고 이별과 그리움, 만남의 아름다운 말들이 이제 그림자처럼 사라져가는 한국에서는 다시 못 볼 것 같은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각기 살기 바쁘다는 이유인데, 과연 그것이 사는 것일까?

머니라이가 일행을 위해 부인과 음식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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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임금 로한이 기자의 품에 안겨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터에 가시고......, 저희들만 있어요. 아마 80년대 쯤 이야기다. 그러나 요즘 한국의 가정에는 개나 집고양이만 집을 지키고 있다.
사람이 머물러야 할 시간에 사람은 비었다. 그런 집의 집값은 천정부지 서민의 삶을 도륙 내는 듯하다. 천천히 가자는 슬로건, 비움, 혹은 느림은 유행어일뿐 극소수의 실천하는 삶 말고는 낯선 이야기다.

지식은 있고 실천은 공허하게 하늘구름처럼 떠돈다.
정성을 다한 머니라이의 가족과 식사를 하고 난 이방인들 기자의 손님들의 얼굴에 웃음이 즐겁다. 불심이 깊은 그들에게서 내가 본 것은 사람에게 향한 마음이다.
그리고 정성이다. 난 그들의 정성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하고 그들의 기대가 있다면 그 기대에 충족되어야 한다. 이런 의무감이 나를 살게 한다면 난 기꺼이 그 어떤 인내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다.

홀로 머무는 시간, 잠재된 내 사람들을 의식 속에서 불러내는 시간들이 있다.
자본주의가 천민적으로 혹은 파괴적으로 발전해가는 요즘에 내가 불가사의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삶의 과정에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즐겁고 난 지금 행복하다. 다 사람들 덕분이다. 히말라야 산골짝에도 중국의 길림을 걷는 내 동포에게도 연길의 지인들에게도 더구나 한국의 팔도강산에도 있다.

머니라이의 넉넉한 웃음은 일행에게도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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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 가는 소형 비행기 안에 모습이다.



배반할 믿음을 갖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설령 내가 배반당한다해도 그닥 배반한 사람에게 보탬이 될 무언가가 없다는, 나의 모자람이 탓이 될 뿐이다.
이제 나는 한국에서 나를 찾아온 귀한 인연과의 시간을 네팔의 화가 비케이와 함께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 길을 재촉한다. 경비행기 안에는 23명이 함께 탔다.

한 시간 후 뙤약볕에 햇살도 강하고 무덥기도 한 룸비니 공항에 내렸다. 또 새로운 한 세상을 보고 만날 것이다. 그리고 길을 열어갈 것이다.
밖을 향해 걸을 때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이상하게도 안의 문이 열린다. 마음의 문이 더 넓고 넓어진다. 훤해진다. 그래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