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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41)

by 김형효 2012. 12. 29.

사색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예를 다하기를 바라며

 

인도 혹은 네팔 남부의 사람들이 걸어오며 꽃처럼 향기를 피울 것만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낯선 이방인에게 멀리서부터 은은한 눈빛을 하고 손을 모아 나마스떼~!라 인사하고 있다. 난 그런 그들을 보며 깨우쳤다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본다. 세상의 많은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미개하다고 하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여 취할 태도를 잊고 산다.

어제의 일상도 오늘의 일상도 그들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경배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깨우친 사람들이란 생각이다. 이 세상을 이루는 많은 나라 사람들이 깨우침을 무기로 미개하다는 지역을 깨트리러 다닌다. 그런 그들의 무지가 지상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휴식을 외면하고 누리기만 한다면 인간의 삶을 그 자체로 지옥이다. 누림을 억제하지 못하면 인간은 그 누구에게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자리를 표시한 곳이다. 박물관 안에 유리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스스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면서 그 누구에게 구원을 바란다는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잖은가? 스스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이다. 멈추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사색하고 그저 그냥 머무는 것이다. 누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주변으로 확대해가는 것이다.

지금 전 인류는 그런 모습으로 일 년 중 하루, 10년 중 하루를 보내는 약속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날마다 인류의 생활공간을 파괴하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기우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모자란 사람의 말도 귀 기울이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힘으로만 밀고 갈 수 있는 것이 세상도 아니듯 우리의 삶도 그렇다. 아름다운 성자들을 바라보며 길을 걷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파격적인 대단한 충격이 아닌 충격이다. 은근하게 내게로 스며들어왔다. 곧 룸비니 석가모니의 출생지에 도착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석가모니의 정신적인 령을 안고 살아온 화가 비케이의 그림이다



1인당 200루피의 입장료를 냈다. 네팔인은 무료, 기자는 한국인이라 말을 했고 2명을 안내해 왔다고 말했다. 기자에게도 무료로 입장하라한다. 잠시 후 입장권을 받던 사람이 기자에게 스님이시냐며 들어가시라 한다. 일행이 잠시 함께 웃었다. 보통사람처럼 머리를 길었고 개량한복을 입었을 뿐이다. 그렇게 반겨준다는 생각을 하며 석가모니 출생지라고 조성해놓은 박물관 정원으로 들어섰다.

이미 두 차례 다녀간 경험이 있어 일행을 안내하기가 수월했다. 곧 신발을 벗어 정리해둔 후 박물관 에 들어가 경비원에게 다가갔다. 사실은 기자다. 사진을 몇 장만 찍게 해 달라! 일행에게 두 세 컷의 사진촬영을 허락했다. 석가모니가 출생한 그 자리에는 유리관이 씌워져있다. 물론 그 자리를 알아볼 수 있게 글씨가 쓰여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어떤 생물체의 탄생과 소멸의 경이가 없겠는가?

놀라운 신비를 보여주는 히말라야, 네팔사람들이 신의 거처로 보는 히말라야의 신비를 보면 인간의 영혼이 자라날 것만 같다.



우리들의 성인에 대한 경배는 더 많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된다. 성인을 축복하고 그들의 축복을 바라는 인간 그 누구라도 스스로 경배의 대상일 수 있음을 인식하였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성인의 탄생과 그에 대한 경배는 비롯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을 축복으로 비롯되어 더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세상 사람이 스스로도 그렇고 서로도 경배하는 대상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길이란 생각 때문이다.

지나온 삶 동안의 거칠었던 순간들에 대해 돌아보는 길이 내가 석가모니 출생지를 탐방하는 길이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예를 올리는 인도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 아래서 라마(승려)의 축복과 기원을 받고 있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최대한의 예를 다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태어날 때, 죽었을 때이다. 그런데 일상에서도 그리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