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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43)

by 김형효 2012. 12. 29.

실천하지 않는 과도한 지식의 축적이 문제

 

 

룸비니 동산을 떠나기 전, 불교신자인 성백선 형님이 룸비니에서 불상을 모시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기자는 마야데비 박물관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수많은 불교용품점을 지나며 한국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먹고 사는 문제에는 많은 것을 걸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많은 한국 관광객을 상대하며 말을 익힌 것이다. 네팔에 한국으로 가는 한국어 능력시험이 치러지기 이전에도 그들은 이미 간단한 한국말을 잘 구사했다.

싸요! 안 비싸요! 안녕하세요? 등의 간단한 말들이다.

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내 나라 말은 때로 아름다운 시어(詩語)보다 반갑다.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기자는 이미 전부터 익숙한 한 가게를 찾았다. 그는 불심이 깊은 성백선 형님이 원하는 불상에 가격을 6000루피라 했다. 기자는 작심하고 반값으로 흥정을 시작했다. 사실 한국에서 사자면 작품의 완성도로 보아 20만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는 이곳 사람들은 좋은 솜씨 덕을 관광객들이 보는 것이다.

최종 흥정가격은 아마도 3500루피 정도였던 듯하다. 불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불상의 앞면은 물론이고 뒷면, 옆면 할 것 없이 섬세한 네팔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배운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삶의 길잡이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알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그런데 알고 나서 그 앎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인간의 과제인 듯하다. 전 인류의 가장 큰 병은 지식의 흥함, 지식의 과도한 축적이 아닌가 싶다.

길 가의 아이들이 우리를 반긴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 우리도 그들처럼 동심의 길을 간다. 함께 자세를 취한 성백선 형


 

아이들이 길 떠나는 우리를 떠나보내며 손을 모은다.



지금 인류는 지식의 축적을 통해 그 앎을 삶에 실천으로 옮겨가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기자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아는 것이라도 실천하고 싶다. 그것은 부첨님 말씀만이 아니다. 내 부모님 말씀도 형제의 말씀도 내가 알고 사는 지인들의 말씀도 모두 한가지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넘치는 현실 세계의 다양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해 그 지식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물건 하나를 접하며 그 물건(불상)에 뜻을 새기다 모르는 것이 많아 너무 아쉬웠다. 그 아쉬움에 이야기가 넘친다. 불상을 구한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쭈욱 뻗은 도로 주변으로 룸비니 인근 마을 풍경이 머물라 속삭이는 듯하다. 그 속삭임은 길가의 아이들에게서도 길가의 흰 소와 염소나 초가집들도 마찬가지다. 지나온 과거가 우리 일행의 마음을 붙잡는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우리의 마음이 간 것처럼 도로 주변마을 아이들에게 손을 모았다. 그리고 나마스떼!라 인사를 하고 함께 추억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가장 유일한 축복처럼 우리는 그들과 인연을 맺는다.

학교다. 지각생들이 낯선 손님들을 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평원을 달리다 차안에서 사진을 찍었다. 논두렁 그리고 물이 많은 둠벙같은 곳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린 손길이 넉넉하다.



맑고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우리와 함께 해주는 아이들이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이 빛낼 향기를 뿜듯이 만면에 웃음을 안고 우리를 반긴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어쩌면 그들은 지나는 낯선 길손에게 축복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마야데비는 그 오랜 옛날 자신의 친정집을 찾으며 이런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었을까? 우리가 낯선 길을 가는 것처럼 그녀도 낯선 길에서 축복을 받았을까? 까빌라 성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한 시간 삼십분 정도가 걸린다.

그때 그녀는 우리처럼 택시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4km길을 걸어 다녔다. 중학교는 8km였다. 그 길도 가끔씩 걸어 다녔다. 그런데 8km되는 길을 나의 어머니는 항상 걸어 다녔다. 몇 대의 완행버스가 다닐 때도 그랬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멀미 때문이라고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8남매를 키워내야 하는 어머니의 삶의 무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나의 어머니는 79세시다. 30년 전 어머니보다 지금은 더 기력이 없으실 텐데도 다 자란 자식들 때문인지 더 먼 길도 멀미 없이 다니신다.

마야데비 생가에 도착했을 때, 풀을 뜯는 이도 있었고 그곳을 뛰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경배의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