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르락내리락 적의 없는 영혼들을 마주하다.
풍채 좋은 영혼의 심장을 틀어진 히말라야! 그 신성의 품속에서 걸음을 내딛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질풍노도처럼 거칠음 없다. 길가 풍경은 산사의 적요를 안고 있는 산사의 석등이나 산사의 불상들처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안위마저 품에 안은 듯이 평화롭다.
앞서도 말했듯이 영혼의 바다 히말라야의 줄기를 붙들고 가고 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산사처럼 모든 사람을 대면하며 웃고 있다. 마치 웃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나는 그들을 보면 따뜻한 봄날의 아지랑이가 피는 들길을 걷는 듯하다. 들풀들이 막 아지(芽枝)를 틀어 올리며 땅 뿌리를 딛고 일어서는 봄날의 향기가 따뜻한 들판이다. 모든 약한 것들을 단박에 힘차게 흔들어 깨워주는 힘찬 봄날의 기운이 느껴지는 날이다. 지치고 안쓰러운 영혼들에게도 두렵거나 쓸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다솜(사랑)이 묻어나는 익숙한 들길을 걷는 아이의 발걸음처럼 나그네 걷는 길이 가뿐하다.
하늘바다의 심장이 주는 맛의 참 주인인 맑고 단 물맛! 그 물이 저 영혼의 바다의 심장에서 쏟아져 나온다. 어머니의 젖 줄기처럼 생명을 이어주는 맑고 단 생명수이다. 저 맑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보면서 살아있다는 그래서 갈 길이 있고 가야할 길이 있고 그래서 가다 가다가 지치고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다시 쉬어갈 힘이 나는 것이다. 어쩌면 저 맑고 단 물맛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생사여탈권을 쥔 험한 바다의 신 앞에서도 용기 있는 뱃길을 열 수 있고 영혼의 바다인 히말라야 기슭의 나그네를 자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젖인 맑고 단 물맛의 참 맛을 아는 이어! 그대는 신의 자손! 영혼의 자손이 분명 맞다.
몇 날 며칠을 걷고 걸으며 당나귀를 보고 야크를 보고 그들과 어우러진 히말라야 영혼의 바다의 자손들인 히말라야 산사의 주인들을 만난다. 그들 네팔 사람들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맑아지고 다솜(사랑)지대에 들어선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모든 것이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맑다. 피부의 각질이 눈 덮인 영혼, 히말라야의 각질처럼 보인다. 사실 눈이 덮인 히말라야나 그 눈 덮인 히말라야를 받치고 있는 히말라야의 모든 언덕배기의 모습은 칼날처럼 각이 서 있다. 히말라야 사람들의 고단한 피부처럼 말이다. 히말라야가 그들의 자식을 키웠을 테니 분명 사람들이 히말라야의 피부를 닮은 것이겠지. 그 피부의 각질을 보고도 풍경소리처럼 맑은 결로 읽혀지는 사람들, 내 영혼의 심장소리가 그의 어깨와 부딪히지 않고도 그들 영혼의 심장소리를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땅을 밟는 순간, 우린 이미 그렇게 된 것이리라.
내 앞에 저들은 나의 친구다. 나이는 어리다지만, 그들과 나의 거리는 없다. 어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 또한 그들만큼 어리다.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다. 그들은 성자가 보살핀다는 네팔의 주인이다. 나는 성자의 보살핌을 받아온 그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도 참 많이 했다. 성냄이 없는 사람들 그들의 영혼을 대하면서 난 어리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내 안에 내가 밖으로까지 튀어나와서 너는 어리구나? 라고 말을 건넨다. 쓸쓸하고 창피하다. 내가 나에게......, 그렇다. 저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만큼 나는 또 대한민국의 사람들, 나의 벗들, 나의 형제들, 나의 이웃들, 나의 모든 나에게 진정 맑고 단 영혼의 심장소리를 들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친다. 그러나 일순간의 허상처럼 맑다. 그 지침이 어느 순간에 왔다간 것처럼, 아주 옛날 아주 오래전 친한 친구의 마실 방 놀음처럼 정겹게 아련해진다. 그저 저 앞의 나그네가 나의 친구들인지 아니면 내가 나그네 길을 와서 저들을 친구로 맞은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그만큼 모든 경계와 경계의 거리가 무의미해지는 곳, 역시 심장 맑은 영혼의 바다의 일인가? 물속을 헤엄쳐가는 육신처럼 영혼의 바다를 헤엄쳐가는 마음의 길이 참 평온하다. 모든 고행(Thaphas)은 끝난 것처럼 말이다. 안빈낙도의 몽유(夢遊)속처럼 평화롭다.
이미 깊은 잠에 든 사람처럼 나의 걸음이 아늑하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