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기대~! УЦ, КИМ(김 거리)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날을 보냈다. 지난 8일 수도 키예프에 갔다가 14일 다시 예빠토리야에 돌아왔다. 오며 가며 완연하게 변하는 계절을 실감했다. 겨울에 왔던 키예프가 다시 새로운 겨울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듯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오가는 기찻길 주변에 무지개색이라고도 형용하기 모자란 단풍이 만발했다.
키예프에 머물면서도 나는 17일 고려인들과 추석맞이 송편만들기 행사에 생각을 집중했다. 우크라이나는 드넓은 평야가 한없이 부러운 나라인데 다양한 야채와 다양한 곡물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찾는 먹거리 야채는 정말 찾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곡물류 특히 콩 종류는 찾기 어렵다. 땅 좁은 우리나라는 그런 점에서 참 풍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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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예프 세브첸코 공원 지난 겨울에 만났던 세브첸코 공원이다. 그때 세브첸코 동상을 보면 무서운 인상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가을에 두툼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그 앞을 지나가지만 저 멀리 물든 단풍처럼 그는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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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석 송편을 만들 때 꼭 필요한 떡고물을 만들기 위해 키예프 유숙소 인근의 중국 시장을 찾았다. 팥과 참깨를 구입했다. 팥고물과 참깨를 살짝 볶아서 설탕을 버무려 송편에 넣을 떡고물을 만들 생각이다. 준비가 끝나고 볼 일을 다 본 후 키예프에 머물고 있는 단원 몇몇과 어울려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만원버스에서 윗옷 호주머니에서 나의 핸드폰을 소매치기해간 사람의 재주에 감탄(?)하며 식사를 한 후 다시 새로운 싸구려 핸드폰을 구입하고 단원들의 번호를 입력했다.
코 베간다는 도시, 역시 도시는 무섭다. 다시 열다섯 시간의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이곳 사람들의 시간으로는 일상인데 우리에게는 여전히 버거운 시간이다. 하지만 낯선 4인용 침대칸의 새로운 사람들과의 시간은 신선함을 주기도 한다. 기차 안에서 만난 하야리 루스톔(Хаяли Рустем, 52세) 심페로폴 법과대학 교수와의 만남은 유익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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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УЦ, КИМ(김 거리) 한 분에 김거리임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허망한 기대~! УЦ, КИМ(김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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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기대를 가졌던 심페로폴 거리의 уц, КИМ(김 거리)가 전혀 다른 의미의 거리였음을 그를 통해 알았다. 내게는 실망스러운 사실이었지만, 하나의 궁금증을 확실하게 해소한 계기가 되었다. 꼬뮤니티스키 인터네셔널 말라죠시 오르가니제이션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역사적 의미에서 이니셜을 차용한 거리이름이었다. 나는 그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필자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현지의 많은 사람들도 하야리 루스톔 교수처럼 지명 유래를 잘 알지는 못했다. 어렵게 여러 명이 근무하는 가게에서 필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한 사람의 여종업원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필자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의 일부 사람들은 사실과 다르게 고려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심페로폴과 예빠토리야는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다. 사실상 오고가는 길에 찾은 것이니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나 다름없다. 필자는 다시 심페로폴에 근무하는 선배단원 둘과 만났다.
20대 후반의 선배 단원들은 가을 낙엽 길을 걸으며 사색에 젖는 듯했다. 한국의 오색단풍과 흡사한 풍경에 이국적 낭만 그리고 우거진 숲에서의 산책은 정말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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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소녀처럼..., 단풍든 소녀들(?) 아름다움을 보면 누구나 지나치지 못하나 보다. 아니면 이국에서 고향을 보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낙엽을 들고 웃음 지으며 책에 끼우는 이유리 단원과 단풍잎을 고르는 강영혜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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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타국에서의 향수를 달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함께 낙엽 길을 걷다가 단풍을 주워드는 모습이 참 고와보였다. 사람은 느낌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무덤덤해지는 나이가 두렵다. 다시 일상을 향해 인사를 나누고 필자는 임지인 예빠토리야에 돌아왔다.
나는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에게 울리짜 김(김 거리)에 대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덕분에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곳 크림반도에는 김알렉세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한다. 아주 훌륭한 분이라며 그분의 이름을 딴 거리를 제안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스탈린은 타민족에게 지나칠 정도로 배타성을 갖고 있었고 노골적으로 비하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 거리라 칭하지 못하고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고 한다. 필자는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에게 나중에 좀 더 상세한 취재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을 했다.
끝나지 않은 고려인들의 아픔을 아는가?
피곤했다. 일찍 잠을 청하고 다음 날에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를 만나 17일 송편만들기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일 문제가 떡쌀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작은 믹서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 어려우면 밀가루 반죽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주 적은 양의 쌀을 담궈 믹서기로 갈아보는 실험을 하기로 하고 쌀을 담궜다. 그때 고려인들의 생활과 관련해서 플로리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플로리다는 자신에게 많은 고려인들이 돌이나 제사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떻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 지 다른 고려인들이 질문을 해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방식과 예법을 잘 몰라 자신이 과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겪었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에는 멋모르고 지나간 세월인데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찌할 바를 몰라 고려인 어른들을 찾아 자문을 구했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면 눈물이 맺혔다. 필자는 모르는 척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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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강모드~송편은 이렇게..., 알았지? 열심히 송편 만드는 법을 일러주는 윤민희 단원~! 그틈에 사진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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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각생 열공모드..., 2부 수업! 사뭇 진지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한국어 수업에도 저런 진지함이 더욱 열심히 해야한다는 사명감을 불어넣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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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얼마 전 그녀의 딸인 레나에게 필자가 건넨 말을 그녀가 되풀이했다. 사실 필자는 웃으며 진담반 농담반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김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는 깊이 새겼던 듯하다. 그리고 레나에게 아쉬움을 표했다. 얼마 전 필자는 사탕을 들고 레나가 한국어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고 <껍질은 까레이스키인데 안은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플로리다는 자신의 과거가 그런 삶이었다며 젊을 때는 모른다고 딸 레나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라면서 아쉬워한 것이다.
믹서기로 쌀을 갈아보았다. 매끄럽고 곱게 갈리진 않았지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행사를 열기로 한 장소에 가서 하루 전에 준비를 하자고 했다. 약속대로 16일 오후에 고려인 게오르기(남편) 집에서 만났다. 미리서 떡고물도 만들고 쌀도 담궜다. 다음날 오전에 집 주인인 고려인 악사나(부인)가 도맡아 할 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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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솜씨 어때요? 누가 누가 잘하나? 제 솜씨 어떤가요? 어째 필자의 표정이 근엄한 사감 선생님 모습인데 모두들 즐겁다는 표정이니 다행입니다. 가운데 빨간 앞치마 윤민희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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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송편 먹자! 처음으로 송편을 맛보는 고려인들~@! 오늘 이 일을 진두지휘한 지휘관 윤민희 단원과 장소 제공 및 업무협조를 도맡은 악사나는 어디로 갔나? 아무튼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은 노래(나리나리 개나리, 둥글게 둥글게, 아리랑)로 화답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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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근처의 다른 봉사단원들이 올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침 끄라스노 뻬레꼽스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민희(사회복지) 선배단원이 전에 부탁한 한국어교재를 가져다준다고 해서 송편만들기 행사에 함께 참석해줄 것을 청했다. 사내 솜씨로 추석을 모르고 지내는 고려인들이 짠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라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한결 자신감이 생겼다. 결국 윤민희 단원의 행사가 되었다. 일이 끝난 후 필자는 윤민희 선배단원에게 <저는 좋은 행사 기획자, 선배는 좋은 일 한 사람!>이라고 웃음을 건넸다.
서툴게 진행된 송편만들기였다. 중간에 한글을 배우는 제자들의 나리나리 개나리 합창은 일을 흥겹게 했고 그들 모두가 즐겁게 배웠다. 필자도 덩달아 신나는 추석맞이 송편을 뒤늦게 만들었다. 그리고 맛난 송편 맛도 보았다. 작은 행사였고 우크라이나의 커다란 땅덩어리를 생각하면 정말 외진 곳에서의 일이지만, 필자는 그 어느 추석 때보다 흥미롭고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상을 차리며 떡을 나누어 먹는데 아쉬움이 있어서 한국에서 보내온 열쇠고리와 핸드폰 고리를 선물로 전해주었다. 명절 맛을 느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