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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내가 만난 세상 이야기

가락동 시장인가? 고려인 장사진 이뤄

by 김형효 2010. 8. 16.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12) -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을 가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군집을 이루어 산다. 사실 무생물조차도 군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좋아 보인다. 필자만의 생각일까? 낯선 나라에 살다보니 여러 가지 생소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거리에서 만난 같은 동양 사람끼리 반가워하는 것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경험한 일이다.

 

일본인과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친근감을 표시하거나 말을 붙이려 한다. 대부분 망설이다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가끔씩 일본에서 왔다, 중국에서 왔다며 인사를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 사람을 만나면 어찌해야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은 없지만 국가보안법의 그늘 아래서 겁나는 일이기도 하다.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마음이 안 좋고 기분 나쁘다. 그 허접한 법을 우리네 위정자들이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하는 국민들은 식민 백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사실 이렇게 살다가는 군대에서 군인복무지침을 외우듯 북한 사람들을 만날 때 행동지침 같은 것도 지니고 다니거나 외우고 다녀야 할 법하다. 아마도 이런 우리네 꼴을 보고 제일 좋아할 세력들은 일본이나 반민족주의자들일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광복절을 기념하려면 위정자들은 그 무엇보다 먼저 민족의 단일대오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 점을 소홀히 하는 세력들을 단호히 심판해야 한다.

 

  
▲ 게르만장과 김료바 게르만장(43세)은 장꼬이 고려인협회장이고 오른쪽 김료바(43세)는 끄라스노뻬레꼽스크의 고려인협회장이다. 둘은 오랜 친구사이다.
ⓒ 김형효
게르만장과 김료바
  
▲ 김료바가 찾은 양파밭 저 멀리 양파밭 주인이 걸어오고 있다. 김료바는 이곳의 양파를 모두 사들였다. 지금 키예프에서는 농사는 고려인이 짓고 이익은 아르메니아인이 본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키에프 농산물거래 상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료바의 분발을 기대해본다.
ⓒ 김형효
김료바가 찾은 양파밭

난민과 다름없는 고려인,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농산물시장에서 만난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딴 이야기로 설을 풀었다. 다름 아닌 내 동족을 만나는 일이 반갑더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만나면 반가워해야 할 내 동족의 가장 큰 주체인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금지된 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혹시 만날 수도 있는 그들을 보고, 법을 먼저 생각해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필자가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을 찾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주 전 일이다. 끄라스노페레꼽스키의 고려인 협회장인 김롑(김료바, 43)의 안내를 받았다. 필자는 이미 김료바와는 장꼬이 고려인 협회 창립 15주년 행사에 함께 참석한 바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장꼬이 고려인협회장인 게르만장의 집으로 왔다. 그가 심페로폴에서의 만남을 약속했다 온 이유는 우크라이나에 와서 농사일을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적을 갖지 못한 고려인들을 위한 일이 있어서였다. 고려인들을 위해 대사관과 함께 협력해서 여권발급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데 최근 우크라이나 당국에서는 여권발급을 더욱 까다롭게 하는 듯하다.

 

그날 김료바가 몇 사람의 여권을 가지고 와 당사자들에게 전하면서 우크라이나 여권으로 바꾸지 못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여권을 가지고 있으나 벌써 10년 가깝게 우크라이나에서 살고 있었다. 딱한 일이다. 모든 생활기반이 우크라이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처지는 난민과도 다름없는 것이다. 필자 눈에 그 무엇보다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제일 걱정스러웠다.

 

  
▲ 가운데 리로나(37세) 우즈베키스탄 국적 우즈베키스탄 국적 리로나(37세)라는 여성이 우크라이나 국적을 받으려 신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김료바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르만장,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필자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 김형효
가운데 리로나(37세) 우즈베키스탄 국적

장꼬이가 고려인들에게 우크라이나 여권을 발급받지 못한 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일을 마치자 필자와 김료바는 곧장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으로 향했다. 김료바는 운전 중에도 2대의 휴대폰으로 쉴 새 없이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서툰 서로의 대화는 중간 중간 끊길 수밖에 없었다.

 

과속이 일반화된 것처럼 급한 운전을 염려하는 필자에게 김료바는 한국의 경찰 자문위원 같은 우크라이나 경찰마크가 새겨진 신분증을 보여주며 으스댔다. 자신은 경찰일도 하기 때문에 단속에 걸리는 일은 없다면서 괜찮다고 염려하는 필자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연이어 통화가 이어졌다. 심페로폴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한 후 예빠토리야로 가기로 한 필자에게 오늘 그냥 예빠토리야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 료바의 또 다른 까페 김 고려인 식당인데 주인은 중국사람 식당은 일본식당 같은 느낌이다. 한국식당이라고 차린 식당의 문양이 다른 곳에도 일본식이 많다. 안타깝다. 필자는 언젠가 한 식당을 찾아 이야기를 전했으나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 김형효
료바의 또 다른 까페 김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 가락동 시장과 흡사

 

한참을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춘다. 알고 보니 김료바는 농산물을 도매로 사서 납품하는 도매상인이다. 한창 양파를 수확 중인 양파밭에 가서 차를 세운다. 곧 밭주인이 다가오고 양파 한망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차에 실었다. 다시 차를 몰아가며 연이은 통화를 이어간다.

 

이제는 통역을 부른다고 했다. 자신은 우리말을 전혀 못하고 필자는 러시아어가 서툴러서 그는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여성을 통역으로 불러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다시 약속했다고 했다. 15분 후 도착할 테니 기다리란다. 멋모르고 간 곳이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이다. 한국의 가락동 농산물 시장과 흡사한 느낌이다. 낯선 곳을 본다는 것은 항상 신선하다.

 

잠시 후 필자는 놀라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고려인들이 진을 치듯 도매시장의 주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지, 양파, 오이, 옥수수, 감자, 수박, 참외, 토마토 등이 그들이 파는 주요 품목이다.

 

필자는 놀라움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치 한쪽 귀퉁이쯤은 한국이라고 해도 될 법했다. 몇 집이 몰려있는 곳에 새겨진 러시아어 글씨 말고는 이곳이 우크라이나임을 증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시 후 한 상점에서 멈추어 섰다.

 

반가운 마음에 지체하고 싶어서였다. 고려인 천류바(43)씨는 하바로프스키에서 1978년에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 끄라스노뻬레꼽스크에 살고 있고 77세라 했다. 그녀는 농산물을 팔면서 시장 상인과 손님들에게 커피도 팔고 있었다.

 

  
▲ 천류바(43세)와 김료바 심페로폴 농산물시장에서 농산물을 팔고 있는 천료바가 커피를 타고 있다. 농산물을 사러온 손님과 인근 상인들에게 커피도 팔고 있었다. 강한 생명력을 보는 안쓰러움이 있었다.
ⓒ 김형효
천류바(43세)와 김료바
  
▲ 농산물을 팔고 있던 한이라(38세) 꺼리낌없이 반겨주던 고려인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그들에게 필자가 미안해서 고개를 들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있다. 배울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일이 무언가?
ⓒ 김형효
농산물을 팔고 있던 한이라(38세)

필자는 그곳에서 반가운 만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그 옆에는 한이라(38)라는 여성이 품질 좋은 감자를 펼쳐 놓고 팔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48년 시베리아로 왔다가 1996년 심페로폴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필자는 그들이 겪은 수많은 인고의 세월과 아픔의 세월을 간단하게 숫자로 정리하고 있는 글쓰기가 너무 안타깝다. 때문에 좀 더 깊은 사연들을 찾고 있지만 애석한 것은 그들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네 역사를 살리는 길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서둘러 구술 작업을 통해서라도 정리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할 일이다. 한번 사라진 역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천류바와 한이라의 아름다운 미소 바로 옆에 다른 것을 팔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족끼리 의지 되는 일이란 사실을 보았다. 장사하느라 검게 탄 얼굴이지만 부끄러움없이 대해주는 그들에게 필자는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어제 그들 아이들에게 줄 학용품과 한글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필자가 만든 자료를 가지고 찾았다.
ⓒ 김형효
천류바와 한이라

필자는 그들과의 짧은 만남 이후 어제(8월 10일) 다시 그들을 찾았다. 천류바의 남편 전유랴(46)를 만났다. 그는 뻬르봄마야스키이에서 따온 드냐(참외)를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림잡아 생각하던 심페로폴 청과물 시장은 처음 생각보다도 더 많은 고려인들이 있었다. 그 곁에 식당을 차려 일하는 고려인들도 있었다.

 

필자는 모처럼 시원한 국시(국수, 이곳에서는 국시라 함)맛을 보았다. 멀고 먼 역사의 흔적을 거슬러온 국시 맛이다. 오늘 처음 만난 최알라(60)라는 분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이주해 와 살다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5년 크림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심페로폴에도 예빠토리야에도 속하지 않는 사키라는 지역의 셀로(селро) 툴다보예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다른 고려인들 아홉 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 오른쪽 끝이 최알라(60세)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괜히 자랑스러웠다. 월드컵만 보고 자랑스러울 일은 아니다. 아직도 잊지못한 모국어가 있었다. 그리고 할 말이 있어 아쉽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마을에도 또 다른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김형효
오른쪽 끝이 최알라(60세)

그녀는 이어 아들 신예브게니(30)가 있는데 그는 같은 고려인인 최알랴(31)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신랑인 최할운(чойхварун)이 장남이고 세운, 철운, 보운 이렇게 네 형제가 더 있다고 했다. 최할운과 자신은 이곳에 살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평양을 거쳐 이주를 해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남편의 고향이 평양인가 물었더니 그냥 이주하는 과정에 잠시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여러 사람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오늘 다 풀어낼 수가 없다. 앞서 김료바와 나눈 이야기들을 좀 더하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김료바의 가족 역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인근의 가라간다라는 도시에서 1963년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처음 장꼬이에서 2년을 살았고 다시 끄라스노뻬레꼽스크에서 14년, 심페로폴에서 30년째 살고 있다고 한다.

 

1989년 결혼한 그의 부인 김타티아나(42)는 치과의사라고 했다. 그는 색다르게 본관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강릉 김씨이고 그의 부인은 김해 김씨라고 한다. 필자가 만난 고려인들 대부분은 본관을 기억하지 못했다.

 

 

 

  
▲ 천류바(43세)와 전료바(46세)의 딸 틈나는 시간에 부모를 돕는 고려인들을 많이 보았다. 드냐(참외)를 자동차에서 내리고 있다. 거친 농사일을 하고 장사를 하는 부모들을 돕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웃는 모습도 더없이 아름답다. 안타깝게 이름을 묻지 못했다.
ⓒ 김형효
천류바(43세)와 전료바(46세)의 딸

고려인 인구통계조사 실시해야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과거 소비에트연방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이 옥토를 찾아 이곳 크림지역으로 이주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까호브까라는 지역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통계는 없지만 만여 명은 될 것이라 했다. 그의 말이 짐작이라서 정확하다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고려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꼭 전해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은 정리된 역사를 몰라서 안타깝다고 했다. 자신이 솜씨는 없지만 지금 사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정리해서 후세에 물려주고 싶다는 희망이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는 끝으로 가장 큰 희망은 힘없는 노인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지금 김료바의 꿈을 조국이 감당해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이 시대에 고려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한민족 인구통계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협회에서도 어느 곳에 몇 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제대로 알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내 동족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하려면 제일 먼저 인구통계가 있어야 하겠다.

 

  
▲ 우크라이나 시장 화투놀이 하는 고려인들 무더위로 손님이 끊긴 시장에서 휴식을 대신한 화투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정말 이 모습만 보면 한국인지 우크라이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 김형효
우크라이나 시장 화투놀이 하는 고려인들

 

김료바 같은 19개 지역의 고려인협회장들이 모든 일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들의 일은 고맙지만 기계적인 결함도 있고 기술적인 결함도 안고 있다. 그들과 함께 하되 각지의 고려인협회장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대사관 내에라도 별도의 특별 기관을 두어서 좀 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통계조사 및 정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여야 모두가 단일한 목소리로 합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모자라는 역량 속에서도 노력하는 고려인 협회장들에게는 고마워할 일이지만 이런 일을 통해서 그들이 또 다른 권한에만 집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지 염려된다.

 

필자는 현장에 있으면서 그런 문제점도 여러 번 목격했다. 후일 기회를 보아 그런 사례들을 다시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