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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러시아를 향해 낯선 길에 선 사람의 소망이 동해 너울처럼 출렁인다.

by 김형효 2007. 8. 9.

역사는 현장에 있다.

그래서 현장감 있는 현상에는 항상 서사적 질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서사가 때로 특별난 것이 아닐 때도 있다.

평범한 현상과 현상이 어우러지며 회를 더할 때

그 또한 줄거리 있는 서사가 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나이테는 그래서 숙연하게 반추하게 하는 것일까?

*2005년 뗏목 <발해호> 포시에트만 근처에서 바닷물에 젖은 뗏목이 얼어 붙어 있다.


2005년 2월 13일 발해뗏목탐사대의 "발해호"를 띄우기 위해 예인선 탐해호를 타고

거진항을 출발했을 때, 그리고 사투를 벌였던 7박 8일의 항해기간 내내 겪었던 공포속에서는

내가 다시 동해에 배를 탄다는 것은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자루비누항을 향해 길을 가다니 스스로 놀라면서

그때의 불안과 공포에서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잊고 길을 떠났다.

떠나가는 뱃머리에서 바라본 속초항 모습

 

그것은 민족이란 이름, 동포애적인 끈을 외면할 수 없는 양심 때문이었다.

중국 땅을 찾을 때마다 나는 백두산의 기상을 느끼고 두만강의 서정을 안으며

민족심의 근원인 용정을 찾았다.

 

오늘 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7월 29일 속초항에서 동춘항운에 오르면서 기대반 설레임반으로 대기하다가 배에 올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고 김지우 님도 2005년 거진항에 함께 있었다.

▲2월 19일 아침 08시 북위 42도 13분 23초, 동경 131도 34분 80초 지점에서 뗏목은 거친 바람과 거센파도 때문에 돛을 펴지 못한 채 출항하였다.ⓒ 김형효

내가 지금 다시 동해의 해류를 타고 자루비누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뭐라고 말할까?

7박 8일 사투를 끝내고 내가 뭍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그는 내게 짧은 격려의 말을 전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승 사람이 아니다.

 

기억의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것이 사람 살이고 그 사슬에 묶여있으면서

그 기억 때문에 행복하고 그 기억 때문에 안타깝고 그 기억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사람살이고 보면

지금 곁에 없는 그리운 이가 더없이 귀하고 귀하다.

그가 더없이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소설가이면서 시인적 심성으로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감싸안고자 했던 이가

지금은 없는 고 김지우 소설가였다.

 

탐해호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배, 동춘항운이 오후 3시 30분경 뿌부-웅 소리를 지르며

동해를 향해 나아갈 때 멀리 속초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속초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더니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망망한 수평선이 눈 앞을 가득 채웠다.

동행인 시인 김동준 님!

 

멀고 먼 수평선 언저리에서 피어오르는 해무(바다안개)가 신비감을 안겨준다.

가도 가도 가 닿을 곳 없을 것 같은 수평선이다.

이제는 절망도 희망도 부자유도 허망도 없는 무중력 상태,

절제도 사치도 모두가 허망 속에 공허함을 채우는 것들 같다.

 

동행한 시인 김동준 형님과 뱃머리를 오가며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다시 뱃머리를 오가며 센 파도에도 의연하기만 한 동춘항운은 탐해호와 비교되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4차선 고속도로와 같은 선명한 바닷길이 났다.

흔적을 남기고 스스로 지워지는 동안 우리는 이승과 저승의 공간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공간은 아닐까?

그 엉뚱맞은 잡념을 우리는 현실에서 망각하고 있다.

지금 사는 이 순간 순간의 그런 공간 아닌가?

바닷길을 내고 앞을 향해, 미래를 향해 가는 동춘 항운의 뒷자리

 

저 멀리 짐작으로는 북녘의 영해로 생각되는 곳에 작은 배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가다가 익숙한 섬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공간이었을 수도 있었던 이 러시아 근해의 섬들이다.

바다 표범이 재주를 부리던 겨울 바다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해무가 피어오르고 멀리 달라진 것 없어보이는 바다 섬들이 눈 앞을 채운다.

공허도 무상도 없이 뭍은 나를 현실의 뭍으로 끌어올렸다.

 

자루비누 항 북방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가 있는 곳이고

안쪽으로는 2005년 발해뗏목탐사대가 정박했던 포시에트만 끄라스키노 항구다.

그때의 기억을 나는 여러편 시로 썼지만, 실패한 기억이라서 아쉬움을 달래는 셈치고

제3시집 <사막에서 사랑을>에 한 편만 게재하였다.

 

 

포시에트만 끄라스키노

 

 

                                                김형효

 

새벽이다.

석탄 하역장 인근에 해수면

대양과 맞닿은 형언 못할 고요로움

천년세월의 진혼굿 올림인가?

포시에트만 끄라스키노* 항구

잠든 해수면의 고요를 놀랠까

밤새 내리던 눈발도 거두었네.

탐해호 주위로 물안개 피어오르고

탐해호 선실에 대조영 후예들만

숨결을 고르느라 바쁘다네.

먼동이 터오면 중원을 말달린 기세로

저 깊은 푸르름 깨우며 동해를 가르고

세찬 파도는 부드럽게

약한 파도는 힘차게

얼기설기 천년세월의 무게 안고 나아가리.

발해호 선상에 선인의 후예들 고요를 깨우며

손등에 파동 없는 고요처럼

뉘엿뉘엿 항해의 돛을 펼치리.

 

 *포시에트만 끄라스키노항

   :발해 시대 최초로 뗏목을 띄웠다고 전해지는 항구 이름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한국 시간 아침 8시 20분경이다.

러시아와의 시차가 3시간이니 현지 시간으로는 11시 20분이 된 것이다.

당초 9시 50분 도착예정이었으나 생각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러시아의 대초원,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아무 것도 뛰어 놀지 않았다.

좀 더 바라보고 있었으면 대조영 선조님께서 말을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


 

장사꾼들이 먼저 내리고 일반 관광객들이 내리는 순서로 러시아땅,

발해의 고토에 발을 딛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어렵게 발해의 옛 땅을 딛고 섰다.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복사한 비자 사본을 제시하고 그 한 부를 전달한 후 곧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버스에 오른 순서대로 일정이 진행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말을 달리듯 대초원을 가로질러 간 러시아 철책선 앞에서

버스에 탄 채로 3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러시아 철책선 앞에 늘어선 버스 행렬, 이 사진 한 장 찍느라 대개 혼났다.

러시아인 버스기사에게......, 하하!

 

다시 3시간이 지나고 차례대로 버스가 철책선을 진입하는 데는 3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진입한 버스가 러시아를 통과하는 마지막 통관절차를 밟게 되었고 중국 국경을 향해

10분 정도 달렸을까? 훈춘이다. 마찬가지로 발해의 고토다. 훈춘을 경계로 북방으로 올라가면

목단강과 압록강 그리고 하얼빈이 있는 흑룡강성이다.

 

중국 입국절차를 밟고 곧 택시를 잡아탔다.

한족이 다가왔으나 그의 말은 애써 외면했다.

그 옆에 조선족 택시기사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리를 이용하려는 데 나는 내 족속에 택시를 이용하고 싶었다.

최소한의 도움이 될까해서다.

물론 편안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했다.

두만강 국경지역의 중국 쪽에는 도문시가 있다.

그곳에 시인 김경희 님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첫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두만강역 광장이다. 중국에서는 도문이라고 부르니 도문역이다.


 도문역광장에서 김경희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도문시 세무국장의 비서관이다.

제법 끝발있는 직책이다.

그가 전화를 받고 와서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민족심이 별로 없다고 하시던 김동준 시인(52세)께서 도문시를 접하고

맨 먼저 한 이야기는 내게서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는 느낌이다.

아마도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실토였다. 

김경희 시인의 안내로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나는 그가 예약해놓은 규모있는 호텔로 자리를 옮겨 여장을 풀고

함께 두만강변을 걷기로 했다.

중국편에서는 도문이 저 산마루 밑에는 북녘땅 남양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