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떠난 12일간의 유럽여행 6] 끄라코프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우리가 꿈꾸어도 좋을 대륙의 꿈은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언제쯤 다시 그 꿈을 꾸어볼까?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다시 폴란드에서 헝가리로 향하며 생각에 잠긴다. 국민의 정부 시절 유라시아 횡단철도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 통일의 꿈과 함께 영글어 가던 이야기다. 오늘날 느끼는 이런 격세지감, 가슴 아프고 지금의 이런 느낌은 참 싫다.
전쟁의 역사를 공유하며 서로 죽고 죽였던 그들이다. 그것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함께 서로 다른 무덤을 썼던 이민족들이다. 그런 그들도 공생을 위해 길을 내었고 그 길을 지키며 협력하고 있다. 그런데 남과 북은 같은 민족으로 부끄럼 없이 자기 민족의 살가죽에 총질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총질과 보이지 않는 모략으로 타민족에게 자기 민족의 반쪽을 고발하고 그 고발의 성과로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다. 배우는 것보다 알고 있는 선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남과 북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되새길 일이다.
평화를 선택하지 못하는 한 그 누구에게도 승리가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오시비엥침에서 발길을 돌려 끄라코프에 돌아온 게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이른 저물녘 노을에 이국의 화려한 뾰족 성당들이 아름답게 비친다. 수많은 영혼들이 기도로 일생을 살았고 지금도 기도로 살아가는 많은 인류가 있다. 어스름 달빛처럼 불안한 세계지만 그 기도마저 폄하할 수는 없으니 사람들의 소망이 두루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저물 무렵 낯선 나라를 찾은 나그네의 기도다.
시내를 서둘러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착한 날은 야경만 보았고 다음날은 아침 산책을 한 정도다. 그리고 곧 오시비엥침으로 발걸음을 해서 정작 끄라코프는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하루 종일 시간을 내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 끄라코프다. 역사의 숨결이 흐르고 현재도 유유히 그 역사적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고적한 옛 수도 끄라코프다.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재가 조화를 이룬 곳이다.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편안함 속에서 공유할 남과 북의 오래된 유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갈려서 흩어진 것은 이산가족만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도 지적 서정의 공간도 사색의 공간도 너무나 많이 막혀 있다. 서정에도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공간을 향유할 자유도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낯선 여행지에서의 내 동족, 내 나라의 안타까운 일들이 사무친다. 한 때나마 열렸던 개성 관광과 금강산 관광, 그리고 백두산, 묘향산 관광 그것은 남과 북 모든 민족의 사유의 공간을 닫아 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 필자에게도 개성관광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다시는 닫히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지금은 나중에 좀 더 길이 넓어지면 가리라 미룬 것이 후회가 될 지경이다.
다시 끄라코프 중앙시장에서 바벨성 일대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쉴 새 없이 바벨성을 찾고 있었다. 중세적 느낌은 말을 끈 수레가 지나가는 것도 잘 어울린다. 마치 내가 영화 속에 엑스트라로 출연하여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어울리는 풍경이다. 가끔씩 낙엽 무덤을 짓고 있는 모습도 낭만적이다. 달음박질치듯 어둠이 밀려드는 시간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을 찾았다. 197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 곳은 산에서 채굴하는 소금에 대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매일 시간대별로 입장할 수 있다. 소금광산 관람을 위해서는 2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개별행동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에 필자는 비엘리츠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광산에서는 아직도 소금을 채굴하고 있다. 아무튼 비엘리츠카 광산은 소금 채굴보다 더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짧은 시간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눈여겨볼 관광업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진행되는 것들 속에서 후일 이런 관광 사업과 연계할 것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끄라코프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향한다. 열차는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한달음에 달린다. 각기 한 열차에 서로 다른 객차에 몸을 실어야 한다. 잘못타면 전혀 다른 나라를 향해 갈 수 있다. 물론 차장이 있지만, 타기 전에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검표가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니 승차 후 다른 열차를 탔다는 사실을 알아도 곧 알지 못하면 낭패다. 초행길 여행자에게 긴장감을 더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2등석을 이용한 밤기차를 탄 이유는 짧은 기간 숙박을 하며 또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장점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앉은 자세로 장시간 기차를 타야 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많은 대학생들과 배낭족들이 선호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어렵게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부다페스트 서역(Nygati pu)에 도착했다. 낯선 거리의 긴장감은 더없이 소중하다. 날선 긴장감이라기보다 파스텔톤의 초겨울 분위기가 더없이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자욱한 안개가 얕게 깔린 거리는 오래된 옛이야기 같은 사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림 속에서 엷은 미소를 띤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손짓이라도 해올 것 같은 날씨다. 생명부지의 도시, 뉴스에서나 듣고 보았던 부다페스트다. 그것은 폴란드에 대한 필자의 감성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폴란드보다도 더 낯설다. 서툰 언어와 낯선 거리와 낯선 표정의 사람들을 만나 길을 물어가며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여행안내 책자 속에 유스호스텔은 문을 닿았다. 그렇게 그 책 속에 유스호스텔을 찾던 중 길가에 표지판을 보았다. 우연히 본 유스호스텔에서 3박 4일을 머물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 전 필자에게 전해준 사람들의 이야기도 적용시켜 보지만 와 닿지 않는다. 필자가 여행을 떠나기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동양적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뾰족 성당의 모습과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낯선 언어들로 보아 전혀 그런 느낌은 없다. 하루 이틀이 지나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폴란드와 부다페스트의 다른 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여서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중국음식점과 터키인들의 케밥집이 눈에 띄게 많았다.
하루 묶는데 12유로 정도 하는 숙소는 요새를 방불케 했다. 방에 들어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포함해서 6개의 문을 거쳐야 했다.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한 문들은 여행객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일인 듯했다. 사실 우크라이나에도 이중삼중으로 복잡한 출입구가 있다. 그런데 헝가리는 그보다 더했다. 흔히 말하는 동구권의 폐쇄성은 출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며칠간의 긴장된 여행 속에 피곤이 겹쳐 유스호스텔에서 긴 휴식을 취했다. 밤이 되고 아까운 시간을 보내기가 아쉬워 야경을 쫓아 바깥구경을 나왔다. 아름다운 도나우 강변의 추억을 만들자는 마음으로 길을 걷고 걸었다. 유스호스텔에서 30분 정도 걸었다. 멀리 사슬다리와 왕궁의 언덕을 보고 또 보며 왕궁의 언덕을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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