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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상그릴라(SHANGRI-LA)의 땅, 네팔에서(30)

by 김형효 2011. 10. 10.

 

신(神)이 사는 파수파티에는 눈물이 없다

 

세계 최대의 장례식장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파수파티에는 눈물이 없다. 물론 간헐적으로 가족과 지인들이 생멸의 순간을 보고 느끼며 복받치는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그런 눈물이 슬픔의 눈물로 인식되지 않는다.

파수파티를 돌아보면 원시적인 공간처럼 수많은 원숭이들이 깊은 정글처럼 오간다. 그처럼 사람과 원숭이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을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으며 다른 곳에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절로 입이 닫히고 말문이 막혀오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명상 길을 가는 사색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파수파티에서 망자의 영혼이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고 있다. 저 강물은 네팔인들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엮어가며 흐른다.



한 사람의 영혼이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고 있었다. 영혼이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곳에서 힌두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서성인다.
시바의 성지인 파수파티에서의 인간은 나약함도 강인함도 잃은 그저 초탈한 현자들의 모습이다. 가족을 파수파티 강으로 떠나보내는 가족들이 흰 옷을 입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식을 찾아볼 것이 없다. 물론 힌두 의식을 따라 맑은 물로 망자를 씻겨주는 의식은 있다.

시바가 보내온 맑은 물, 시바가 보내준 생명의 물을 망자의 얼굴과 지혜의 샘인 이마의 한 가운데 지점에 적셔준다. 기자는 파수파티를 세 번째 찾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성수를 적셔주는 의식, 그러니까? 아직 화장을 시작하지 않은 망자, 막 지상의 세계를 떠나는 망자를 보았다. 가족들이 파수파티의 강물로 화장을 해서 떠나보내기 직전 의식인 것이다.

한 망자의 유가족이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그에게서 슬픈의 눈물은 볼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아니 살고 있을까?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는 그런 의식 혹은 의문 혹은 질문들을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된다. 그런 자리에 서면 국가나 사회 등도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속절없는 것들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가족과 그 근거리의 연결고리 속에서 인생을 보낸다. 또 떠나보낸 후에도 인연을 만들고 있다.

네팔 사람들은 결국 신과 살고 있다. 그들의 신은 멀리에도 있지만 항상 그들 곁에 산다. 그들의 믿음이 그처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들의 믿음과 신은 너무나 가까운 일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미개해 보이기도 하지만 경이롭게도 느껴진다. 집과 거리와 사원과 그들 마음은 하나다. 생활이다. 낯선 자들의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은 그들의 진정과 이성을 모르기 때문일 뿐이다.

세계 최대의 장례식장이란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화장된 영혼은 살과 함께 저 강물을 흘러 천상과 만난다.
막 이승을 떠난 망자다. 시바의 생명수를 적셔주는 영혼의식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파수파티를 떠나 파턴으로 향했다. 파턴은 네팔 불교문화의 상징으로 넘실대는 도시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대도시이며, 현대화 되지 못한 도시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낯선 도시는 그들이 얼마나 찬란한 문화인의 삶을 영위했었는지 알게 한다. 물론 벅터푸르라는 도시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게 되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카트만두 인근에 위치한 파턴과 벅터푸르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함께 네팔의 상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카트만두, 파턴, 벅터푸르는 고대 왕국들이다. 모두가 그 중심 세력은 네와리족이었다. 그들은 몽골리안인데 어찌해서 힌두교에 깊이 빠져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상인 세력들인 그들이 고대왕국을 이루었음에도 지금으로부터 280여년전 사흐(Shah)왕조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파턴은 불교의 각종 기념품들과 불상이 조각되는 유명한 곳이다. 골목 골목마다 불상과 불교 기념품 가게로 넘쳐나고 조각상과 기념품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