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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49)

by 김형효 2012. 12. 29.

인간의 기억이 아름다운 인간을 만든다

 

사람이 다져 놓은 길이 있다. 그 길을 사람과 당나귀, 말과 양이 걸었다. 훗날 자동차가 그 길을 따랐다. 대부분의 세상이 그렇다. 히말 계곡은 다르다. 사람이 다져놓은 길을 자동차가 다니고 자동차가 다져놓은 길을 말이 걷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과 사람을 살리는 동물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가던 길이다. 이제 사색도 죽어버린 것이란 생각이다. 문명은 그리 가혹하여 히말 계곡의 작은 사색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색을 말하는 것은 이제 소수의 인간에게나 허용되는 말 같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죄악이다.

좀솜(Jomsom)에서 각배니(Gagbeni)를 향해 걷고 있다. 드넓은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사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거친 문명 속에서도 사색을 즐긴다. 그것이 인간이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생전 초면의 바람처럼 생전 초면의 사람이 다가온다. 히말 계곡에서 말 등을 타고 오는 사람이 우릴 보고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반기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고맙다. 정겹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본향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란 생각이다.

바람이 흘러가버린다. 사람도 그렇게 간다. 그러나 다시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람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걸고자 한다. 그것은 기자의 바람이며 모든 인간의 바람이라 믿고 싶다. 내가 사람으로 살면서 챙겨야할 필수적인 것이 인간 본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억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인간을 배반한다 해도 내 스스로 배반의 자리에 서지 않으리라. 여행자의 자유로운 걸음 속에서 지나치게 깊은 사색인가 싶다. 아마도 현실에서 그만큼 처져서 살아온 탓이리라. 인간이 그리운 자리에서 오래 머물렀던 탓이리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사색의 자리를 옮겨가는 것처럼 일행은 걸었다. 바람도 그 자리를 채우려고 불어오는 것처럼 쉬었다 불었다. 우리의 호흡처럼......, 고즈넉한 숲속을 걷듯 드넓은 히말 계곡이 적요롭다. 온 사람, 걸어본 사람, 본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히말을 즐기고 있다. 아득히 보였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그림자 같은 히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 곁에 있다고 보채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신선한 바람을 무동 타고 온 히말이 자신의 체온을 느끼게 한다.

가끔씩 호흡이 가쁘기도 하지만 고산증세는 아니다. 바람이 거칠기도 하고 바쁜 걸음 탓이다. 그래서 느릿느릿 걷는 자에게만 히말은 풍요롭다. 삶에 길에서 우리가 간직해야할 것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온전한 것들은 천천히 다가온다. 온전한 것을 향해 가고자 한다면 천천히 느릿느릿 걷고 사색할 필요가 있다.

좀솜과 각배니 사이의 드넓은 강줄기를 달리는 말 탄 사람이 일행을 반긴다.


 

동물과 사람이 낸 길을 자동차가 달린다. 다시 그 길 위를 말이 달리고 있다.



멀리 계곡이 내 눈 앞에 다가선다. 내가 다가선 거리보다 더 웅장하고 더 깊은 계곡을 드러낸다. 난 이미 두 차례 걸었던 길이다. 길의 흐름도 계곡의 경사도 다 익숙하다. 가끔씩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이 낯설다. 거친 비바람이 스쳐간 언덕빼기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 그 아래로 차가 지나간다. 몇 대의 지프차다. 그 뒤로 당나귀가 지나고 그 뒤로 염소 떼가 지난다. 몇 해 전 기자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들개는 보이지 않는다. 그 개의 안부가 궁금하다. 홀로 걷던 길에 길동무가 되어주었던 개다. 한참을 걷다가 개가 보이지 않아 궁금할 때쯤 기자를 기다려 주고 있던 개를 다시 만났다.

사람은 일상 속에서 애타는 그리움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살아간다. 윤회를 말하지 않아도 인간의 기억은 아름다움을 응고시킨다. 그리고 그 응고된 기억은 인간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강화시키고 숙성시킨다. 그것이 인간이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고통과 좌절, 투쟁 그리고 가혹한 인내가 결국은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은 그 혹한 시련들을 배반하거나 외면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다.

어린 시절 서해 바닷가 갯벌가에서 자라던 풀이다. 양의 곡식이다. 약초로도 쓰인다는 히말의 풀들은 모두가 진하고 아름다운 허브향을 낸다. 신비다.


 

기억을 저장하는 김판용 시인이 일행보다 한참을 느리게 걷고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다. 지금은 과거보다 더 빨리 좌절한다. 지난 사람의 기억일 뿐인가? 세월의 나이테가 더해질 때마다 더 많은 것들을 잃는다. 얻어낸 자리를 밀어낸 사라져버린 것들이 있다. 밀려난 그것들이 어쩌면 더 소중했던 것 아니 그것이 인간이 갈 길이란 생각을 뒤늦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 서두르다 환영幻影처럼 사라진 것들을 떠나고 떠나서 멀고 먼 여행길에서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자리에서 천천히 걷자. 어쩌면 이것은 모자란 기자의 자기반성이다. 혹여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생각할 여지가 있을까? 멈추지 못하고 사색의 변을 늘어놓고 있다.

해발 2,000미터를 넘어섰다. 바람은 차갑고 햇빛은 뜨겁다. 구름 아래 산, 산 위에 산, 보이지 않는 구름 위에 구름 산, 그 너머에 히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히말을 찾아 길을 나선다. 삶에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맹목적인 것일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히말을 찾아나서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