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구소련의 아픈 역사
내가 한국에서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안 것은 뉴스를 통해서다. 소련의 개혁개방의 상징인 페레스트로이카다. 그런데 그것이 크림 따따르족에게 가져온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슬픈 역사였음을 이곳에 온지 20개월 만에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다시 알게 되었다.
사실 1986년 이후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이 추진하였던 정책의 기본 노선인 페레스트로이카는 한국인들에게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이라는 사전적인 용어 이상의 의미가 없다. 필자처럼 뉴스를 통해 본 입장도 특별히 다름이 없었고 그들의 삶을 보는 데는 생각조차 미치지 못했다. 상당 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정책을 받아들여 살기 좋은 세상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와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도 가졌을 것이다. 정말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생각이었다.
소련에서 개혁개방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자유화를, 외교적으로는 긴장 완화를 기조로 했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사회주의의 본질적 내용의 재규정을 위해 제기하는 중요한 이론적 문제들은 크게 아래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을 기사나 여러 연구들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첫째, 개인과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개인의 자유의 확대와 이에 따른 경제적 효율성의 확대와 국가의 개인에 대한 보호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라고 한다. 이 경우 개인의 사회적 보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영역과 경쟁을 조화시키는 과제가 중요하게 된다.
둘째,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유권의 문제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국가소유만을 인정했던 과거의 정책에서 개인에게 다양한 생산수단을 허용하는 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국가소유, 협동조합 소유, 개인소유 등으로 소유 형태를 세분화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어떻게 다양한 소유형태를 인정하는가의 기준 설정이 주요과제이다.
셋째, 사회주의하의 사회적 정의의 재규정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과거 체제하에서 일하지 않고 분배를 받던 기생적 형태의 제거에서 적극적으로 개인과 그룹의 생산성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분배체제의 정비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20개월을 살면서 가끔씩 구소련 시대 레닌의 초상을 다시 그려보고는 한다. 그를 기리는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을 만나는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렇다. 다만 스탈린은 소련 시대의 정치지도자였던가 의심이 갈 정도로 언급도 없다.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고르바초프는 레닌을 언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수와도 같은 사람이리라. 그러나 그런 비판도 없다. 고르바초프 입장에서는 이런 소외가 다행일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우크라이나 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의 복귀를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러시아 민족만의 바람이 아니다.
고려인도 그렇고 따따르 족도 아르메니아인들도 대다수의 소수민족들이 그 갈망이 더욱 크다. 그 원인과 이유를 손에 잡히게 이해하지 못하다가 최근 인터뷰한 크림 따따르 족의 후손인 엘비라(ЭЛЬВИРА, 여성 54세)라는 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크림 따따르족들은 크림 지역의 흑해연안에 주요 고대도시의 중심인물들이다. 그들이 우크라이나 크림지역의 역사를 일구어온 사람들이라 해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의 역사를 그리 단조롭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들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나 터키, 폴란드, 아르메니아, 헝가리, 독일, 러시아 등의 다양한 민족들이 과거 그곳을 기반으로 전쟁의 역사를 썼거나 그런 토대 위에서 생존의 역사를 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크림 따따르라는 이름처럼 크림 따따르 족처럼 크림의 역사에 주체적인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을 흔히 터키에서 건너온 터키사람으로 규정하는 서투른 여행자적 관점으로 말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주장하듯 그들은 터키 이전에부터 크림 주변 지역에서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언어와 역사 문화 주체를 형성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머물렀거나 여행을 하고 가지만 그들조차 크림 따따르의 실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터키에서 온 무슬림들로 규정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종교적으로 무슬림을 믿는 사람이 다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꼭 터키인들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래전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역사를 반복할 때마다 그 부침을 함께했다. 그들의 상당 수는 우즈베키스탄에 살았었다. 마치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정신적 영혼이 통하던 곳이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우즈베키스탄이었던 듯하다. 그런 그들이 페레스트로이카를 겪으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상징하는 개인과 사회적 개방의 그림자가 되어 가차없는 박해와 폭력에 의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던 역사는 흔히 알려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도 그 아픔이 끝나지 않았음을 크림 따따르 족의 후손인 엘비라(ЭЛЬВИРА, 여성 54세)라는 분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잇었다. 그녀는 아직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필자에게 자신의 인터뷰를 한국에 소개하되 우크라이나나 기타 소련연방에 속했던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것은 피해자의 피해의식에서 오는 억압된 심리일 것이다.
1987년에서 1989년에 흔히 말하는 스탄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에서 가해진 무차별 폭력의 경험을 들으며 1937년과 1938년에 있었던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떠올렸다. 당시를 말하다 눈물을 지으며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을 참아내야 하는 고려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크림 따따르 족의 후손인 엘비라(ЭЛЬВИРА, 여성 54세)라는 분을 통해서 현재를 보았다.
필자는 한 순간도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면에 그렇게 가혹한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둔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인류애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 같다. 알지 못하는 아픔으로 어찌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을까 말이다. 누가 뭐라해도 소련의 붕괴 후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가족과의 생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백주대낮에 폭력에 의해 살해당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저주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지옥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다시 돌아온 고향 크림에서 움막을 짓고 다시 살아내온 역사, 그리고 아직도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정착하려고 발버둥을 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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