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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처절에 눈 감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by 김형효 2011. 6. 14.

 

 상그릴라(SHANGRI-LA)의 땅, 네팔에서(6)

 

네팔사람들과 말하다보면 네팔은 모두가 왕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만큼 개인적이라는 이야기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의식보다 자신의 삶이 우선인 사람들이다. 누가 그 개인의 삶의 우선적인 몸부림에 대해 나무랄 수 있으랴! 수업을 진행하다 양념을 곁들이듯 하는 말이 있다.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내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특히 가혹한 네팔의 현실을 보라! 사람들은 서로 나라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거리의 처참한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내게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네팔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을 한다. 너희들이 살고 너희들의 아들, 딸과 가족 형제들이 살 땅이기 때문이다. 밥을 남기지 마라, 남겨서도 그냥 거리에 버리지 말라.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다. 네팔의 거리에서 진정으로 와닿는 소리임을 실감한다.

헤므라저 형님과 큰 며느리 레카, 그리고 손자들이다.

구체적으로 밥을 어떻게 남기지 않고 먹는지 그 방법까지를 설명한다. 네팔 사람들은 넘치게 밥을 해서 포식자들처럼 식사를 한다. 남기지 않고 먹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남는 밥과 채소, 달이라는 죽과 국의 중간쯤 될 음식을 썩어 버린다. 쓰레기도 가는 곳마다 천지다. 흙먼지와 뒤엉킨 거리는 가혹 그 자체다. 오토바이로 픽업해주는 덕분에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이런 저런 괘씸한 사색을 할 때도 있다.

네팔의 지도자들은 눈이 없는가? 대체 이 거리의 환경문제를 그들은 못 보는가? 환경전문가가 아니어도 바로 알 수 있는 처참이다. 그들이 집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다. 높은 지위에서 더 높은 지위와 더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그들의 국민은 병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나라는 병들고 있다. 

그들은 날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언론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희극배우들처럼 여겨진다. 이제 더이상 눈감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처절을 보는 눈을 감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공인이나 개인이나 삶의 길에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거리의 기도처에 중년 신사가 기도를 올리고 학생은 길 건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학생도 성자처럼 보인다. 짐을 진 사람이 거친 한 걸음을 옮겨딛고 있다. 사탕수수를 마시며....., 사색하다.

라짐빳은 구왕궁에서 걸어서 5분거리다. 건설붐이 일고 있는 카트만두에 아직도 자전거에 마차처럼 사람을 실어나르는 릭샤꾼들이 모여들고 있다. 릭샤 정거장 같다.

처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사람을 존중할 때조차 상대를 자신의 발 밑에 놓고 응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결함이 결국 인간이 만들어온 이성적 사회의 모순이라 생각한다. 그런 모순은 지식인과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서민들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서민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간단히 취급한다. 그들의 무지 혹은 무시가 일반 시민 혹은 서민을 대할 때 아동을 대하듯 지능이 낮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연은 인간의 처참한 현실에 대해 어쩌면 무서운 위력으로 슬픔을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넘어설 수 없는 혹은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분노에 찬 슬픔을 표현하는 것들이 자연적인 현상들은 아닐지? 카트만두의 밤비가 거칠게 내리는 깊은 밤에 잠에서 깬 사람의 사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