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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맑은 영혼의 곳간을 가진 네팔 사람들

by 김형효 2012. 12. 29.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54)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없이 벅찬 것은 꾸밈없는 웃음이다. 이 또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축복이다. 서울에서 만적인 물대포가 영하의 날씨에 사람에게 뿌려진 것을 보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죄스럽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묵디낫을 오르며 생전 초면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주고받은 짧은 대화 속에서 인간이기에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경계 없는 웃음이 간절하게 생각나서다.

수많은 거친 것들을 곧잘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렇게 믿기에 히말라야를 걸으며 깊은 사색을 전하는 자리에 서울의 물대포 소식은 더없이 아프기도 하다. 이제는 더 욕심 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산다. 많은 것을 가져보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많은 것을 갖지 못해서 하늘을 갖기로 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대화하고 하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내 처지에 맞춰 누려보자는 마음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머무르는 것보다 히말라야를 벗 삼아 그 깊이에 머물러 사는 맑은 영혼의 곳간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자 결심했다.

살구를 파는 산골 여인의 웃음



그렇게 네팔을 찾았고 이제 모든 것이 익숙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끔씩 한국에서 전해지는 평화롭지 못한 소식들이 가슴을 아프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숨막힐 것 같은 내 나라의 환경들 삶의 질들을 따지며 겨우 견딘다. 그런 것들이 생각날 때면 모든 것을 잊고 싶어진다.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할 때면 곧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영혼을 키우는 길에서 걸음을 옮겨 딛으면서 생각에 잠겼던 이야기를 주저리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에 하나란 생각을 한다. 자족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안타까움이 크다. 다시 히말라야 산중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검게 탄 얼굴을 하며 살고 있던 히말라야 능선의 하나인 묵디낫에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우리네 현대문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만큼 못할 것이 무엇일까?
사진 속의 그녀를 보라! 그녀는 우리에게 살구를 팔면서 우리가 원하던 것을 주지 않고 다른 것을 내놓았다. 산중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더 좋은 상태의 살구를 내놓으면서 하는 말은 지금 사시려는 것은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달라던 것이지만, 그냥 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좋은 것을 찾아 내주었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마음이 인간이 가졌던 처음 마음일 것이다. 한 번 지나면 다시 올 것 없을 것 같이 머나먼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한 친절은 어떤 것일까? 눈속임을 해서라도 욕심을 챙기려드는 사욕에 찬 정치인들은 대체 무슨 마음을 가진 것일까?


 



명상에 잠겨서 사는 사람처럼 맑은 사람들을 대하며 나는 어쩔 수 없다. 나는 현대문명 속에 사는 곳을 향한 안타까움을 전하는 편에 설 수 밖에 없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인간의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산속 절벽에 평화로 가득한 부처님이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그 웃음을 대하며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저토록 찬란한 웃음을 짓고 살아가는 승리자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들 중에 진정으로 평화로운 느낌을 가진 사람을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신상명세서에 종교를 묻는 질문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 써야 할 것 같고, 안 쓰면 불경스러운 듯해서 그냥 불교라 적었던 어린 날이 생각난다.

나는 모자라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갖는 자유로운 선택인 신앙조차 갖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걷다가 달리 생각해보면 믿음의 대상에 위대함을 믿는 것은 좀 모자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엉뚱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믿는 자가 저토록 아름다운 웃음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 대상인 신들조차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충만해서 넘치는 웃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위대함을 믿지 않더라도 신은 인간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진정 신이 있다면 반드시 신은 그 길을 가야할 것이다.



신을 말하는 것이 무섭거나 두려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신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비롯한 수많은 문명세계에서는 신들을 무기로 싸움을 하고 있다. 신을 두고 경쟁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 히말라야의 신선한 바람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울 정도다.
나는 부끄러운 걸음을 옮겨 딛는다. 때와 장소에 따라 사색할 것도 달라야 하는가 싶은 것이다. 일행과 걷던 걸음은 네팔 사람들의 민요와 우리네 아리랑을 번갈이 하듯 부르며 빨라졌다.
2600미터에서 시작한 산길이 어느새 3800미터 일행이 목표한 길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들과 인연이 너무 짧다고 안타까워했다.

향그러운 바람을 대하듯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졌다.
그들이 안내하는 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리고 고마운 인사를 그들이 즐기는 네팔 전통차인 찌아를 대접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생전 초면의 인간과 인간이 주고받은 대화다. 같은 말을 쓰지 않고 같은 음식을 먹지 않고 같은 나라에서 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더 우리와 가까웠다. 우리네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것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오랜 고대로부터 다가온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전하듯 우리가 간직해야할 것들을 정리해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만한 시간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