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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대 무용과 김기인 선생의 작품 - 스스로 춤 -을 보고

by 김형효 2008. 9. 25.

- 정적을 깨트리는 아늑한 자유, 평등, 해원의 세상

 

 

1.

정적을 깨트리는 아늑함 속에서 꽃이 핀다.

동토의 땅이 녹아내리고 거기 아지(芽枝)가 돋는다.

집의 아늑함에서부터 고요하게 깨어나고 있다.

원의 둘레를 돈다.

북이 울린다.

경쾌한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숨죽이고 고요를 본다.

그 안에서 대동 놀이처럼 편한 울려 퍼짐!

합(合=++)하여 탑(塔=土++++口)을 쌓는다.

자연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 땅이 숨을 쉴 때 춤꾼들도 함께 숨을 쉰다.

그렇게 자유한 땅의 영혼이 느긋한 숨결로 반짝인다.

살짝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흰 머리의 노인 한 사람의 걸음처럼

평등하고 고즈넉하고 자유로운 해원을 본다.

 

구속 없는 재량으로 모자람이 없는 만큼씩 빛도 원을 중심으로 일어나

사이 길을 만들고 그 사이 길의 인연을 만들고

그 길로 서로 이어져나가고 서로를 아우르고

그 아우름이 개별화 되면서 파괴되지 않고 넉넉해지고

억압 없이 자유롭고 보이지 않는 격정을 안은 미소가 살아나는

고즈넉한 어울림의 세상이 찬란해지고 돋보이는 아우라!

 

개별적인 것들이 개별적으로 분해되어 있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아이처럼 천연덕스런 격조를 보여주는 춤이 보이지 않는 춤 없는 춤사위!

해맑은 아이들의 놀이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봉우리를 이룬 이웃과 나그네와 나

서로가 서로의 경계에서 너나들이 하는 사람들의 찬찬한 신명!

 

나는 너를 살리고 너는 나를 살리고

그렇게 울림 속에서 울음 속으로 슬프지 않게 스며들고

그 울림 속에서 울림 밖을 바라보고 날개를 펴며

자유를 얻는 춤 없는 춤!

 

모두가 하나의 무늬가 되고 꽃이 되고 꽃술이 되어 피네.

그 꽃 속에 숨죽이고 숨은 아리랑!

느긋하게 덩실덩실 아리랑이 화(和)하여 화(華)하고 있다.

 

2.

거친 파도가 깨지고, 깨지고 난 자리에 거품처럼 스러지고 거품이 다시 파도의 원형을 세우려 몸부림치며 각을 세우고 다시 깨지고 합하고 각이 되어 세워지고 요동치던 15인의 무용수의 꿈은 몽환적인 세계 안에서 살아남은 허무를 온몸으로 흐느끼듯 몸부림을 놓는다. 잔존의 허무와 허무가 교차할 때마다 귀곡산장의 메아리가 나의 울림처럼 알 듯 말 듯 가랑가랑하다. 마치 멈출 수 없는 귀곡산장의 축제의 정한을 보다 지친 영혼들이 다시 축제를 열고 영혼의 축제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은 허무 혼을 본다. 자신 안에 칼끝이 꽂히는 것을 온몸으로 읽어 가는 무통증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처럼......, 무용수들 속의 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저물 무렵의 서녘처럼......, 몸과 마음이 붉디붉은 *홍시꽃이 된다.

 

*홍시는 빨갛게 익은 감을 말한다. 그 빨갛게 익은 감을 꽃으로 표현했음

 

 

3.

안위 없는 위안은 말장난이다. 하지만 안위 없는 위안처럼 넋을 잃은 위안을 느낄 때가 있다. 그처럼 널브러져 버린 영혼, 더 이상 기댈 넋의 공간을 잃어버린 상실혼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너그러움이다. 상실혼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스스로가 얼마나 너그러워졌는가를, 그래서 그 너그러움의 가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너그러운 영혼도 갖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스스로 춤-이 될 때까지 흐느껴 본 영혼을 알 것이다. 매순간 순간 상실의 시간이 자기도 모르는 무감각상태의 절제 없는 춤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나도 몰래 빛의 속도로 내 안에 머무는 -스스로 춤-이 모든 사람들 속에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을 대행할 수 있는 자아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놓치고 살아간다.

 

오늘 이 -춤 없는 춤-같은 -스스로 춤-이 자신들을 영혼의 낙원으로 이끌어 주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스스로 행복-을 찾고 속울음을 깊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춤꾼들의 아니 현대적 의미에 나의 영혼의 살풀이를 대신하는 무용수들에게 무대의 매너를 요구하지 못하고 나의 심장을 두근두근 울려주는 분리된 나의 심장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나다. 하하~! 허허~! 실실 웃자~!

 

영혼의 낙원을 놓친 사람이라도 슬퍼 말자. 거기 딛고 서기 싫은 관객의 마음도 있을테니 그를 비평가라고만 나무랄 이유는 없다. 내가 아닌 무용수를 바라보는 나는 없고 관객으로만 남는 경우에는 충분히 그 낙원의 울림도 잊고 착한(?) 혹은 모자란(?), 똑똑한(?) 관객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너무나 많이 잘못(?)배운 사람들의 허망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몸부림을 치는 무용수를 보고 저 모습이 나다. 나의 모습의 일부라고 볼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보는 여유가 어떤 사람의 움직임을 혹은 살아있는 대상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가져야할 태도란 생각을 한다. 딛고 서기 힘들어! 사람들은 자기 자리를 떠난다. 아주 많이씩......, 용기 있게 그리고 격하게 후일 켜켜로 쌓인 후회스러운 나이테를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그때가 서글픔의 시간이다.

 

이(離=떼어놓고)와 별(別=나누고)과 인(因=까닭)과 연(緣=묶음)의 고리를 틀고 이어지는 청(靑=푸르다),춘(春=젊은 때),고(苦=괴로워하다),행(行=나아가다)의 시기는 사계의 꿈을 꾸는 시기처럼 처절하다.

바로 그 순간의 모든 인간들이 꿈을 꾸는 것은 깊은 열병의 시기인 듯하다.

그리고 평온을 찾는다.

상처 속 고독이 청춘고행을 겪은 사람들의 등을 다독여준다.

바로 풍요로운 고독이라는 삶의 커다란 결실을 거둔 것이다.

상처 속에서 영예로운 사랑을 끌어안는 시기 맑은 이슬 한 방울이

나뭇가지 끝에서 수직으로 낙하하는 것처럼 맑은 눈물이 수직으로 찰나처럼 빠른 속도로 느긋한 눈꺼풀을 외면하고 떨어져나간다. 살갗을 도려내듯 고통스럽게 그러나 만면에 웃음을 주고......,

 

 

4.

고즈넉함이 주는 피로함에 운다.

그 열기는 적요(寂寥)한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내 심장을 두드린다.

넋 잃음 속의 창조,

넋 잃음 속의 환희,

넋 잃음 속의 격정,

넋 잃음 속에서 바라본 넋,

넋과의 만남, 넋의 흩어짐과 넋의 통일,

다시 깨어진 넋과의 결합,

산사의 나그네는 풍경화 속의 풍경처럼 자신을 볼 수 없다.

다만 산사(山寺) 바깥의 나그네만이 풍속화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차 한 잔!

오늘 산사는 없고 나그네의 심장의 두근거림만 산사를 짓고 있다.

나의 심장이 찾잔을 들고 배회하고 있다.

도심 끝에서 나는 나의 심장을 붙잡고 나를 기억한다.

몸부림이 느긋하지만, 폭풍처럼 억지고요 속에 비바람이 되어

천지를 깨우는 고즈넉한 태동(胎動)!

 

 

5.

사방세계의 경계를 만들고 넘고

어기여차 힘차게 너울 같은 기세로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그렇게 넘고 넘다가 지치고

다시 넘고 넘다보면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이

내 안에 나를 넘는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고

넋도 없이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렇게 사방세계의 경계를 넘고 만들고

끝에 가서는 꼬이고 맺혀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이 해체되고 마는 가 했는데

다시 하나가 되고 맺힌 것도 남은 것도 없이 되고

우리라는 말도 멋쩍게 서슴없이 어우러지는 춤이 되는 꿈,

빨갛게 파랗게 검게 하얗게

그렇게 사방세계의 문을 열고 닫고

저 제(祭=사람과 신이 서로 접하다)와 의(儀=풍속)속에서

스스로 존엄한 가치를 만나고 스스로에게 엄숙해지는 동안

격렬하게 색색의 경계 안에서 서로

서로가 강렬히 응시하고 응대하고

어쩔 수 없는 밀회처럼 충실한 만남과 엇갈림이 있는 자리

결국은 그 거침없는 교차승인의 과정을 팽팽히 이어가다가

포기할 때쯤, 격렬한 포기의 과정이 선택의 과정에 이르고

서로 신과 만나는 인간으로 신과의 경계에서 조화로운 행복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