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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에서 나는 집으로 간다.

by 김형효 2009. 11. 24.
 

예빠토리야 산책 길이다.

종일토록 집에 머물며 음악을 듣거나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가끔씩 한국 소식을 접하기도 하며 인터넷을 하며 뉴스를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저물녘을 걷기로 하였다.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서는 날씨가 참 좋다.

 

노을이 짙어오는 시간이다.

이 나무의 계절도 오늘이 깊다.

그러나 다시 새해의 봄날 푸른 잎으로 그 자리를 밝힐 것이다.

나도 그처럼 일상을 다시 새해를 그렇게 밝혀가고 싶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맞춤한 날씨다.

거리의 풍경은 황홀하다.

몇걸음 옮겨 딛지도 않았는데

멋진 가을을 그냥 보내기 싫어 카메라의 셔터를 가을을 움켜잡듯 눌러댄다. 

그렇게 가을은 내 손에 잡혔다.

아니 사진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하늘이 하나의 넓은 갤러리처럼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주는 겨울 초입이다.

황홀하다는 마음이 설레는 마음이 머물 곳을 찾아 방황하는 가을바람같다.

내 마음이다.

저렇듯 황홀한 하늘을 사람들은 왜 바라보는 것을 포기했을까?

 

먼저 집 주변의 수많은 숲길의 한켠에서

멋진 여성들이 소나무와 벨료자(자작나무)나무를 배경으로 가을을 붙잡고 있다. 

나도 그 모습을 잡는다.

그리고 옹이진 소나무의 결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 가득 인생의 희노애락이 담기듯

소나무의 희노애락이 가득 스며든 옹이진 결을 한 소나무가 카메라에 담긴다.

 

하늘의 구름이 심상치 않은 무늬를 놓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생각이다.

무엇에 심사가 뒤틀린 걸까?

하늘이 무언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것들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장미꽃이다. 

겨울 초입에 두려움도 없이 황홀한 색으로 피었다.

찬란한 자신의 몸통을 자랑하며 누구를 유혹하나?

아마도 곧 어둠을 몰고올 노을을 유혹하는 것일까? 

 

몽올진 흰 장미가 곧은 심지로 자신을 지키는 듯하다.

먹잇감을 찾는 곤충이 흰 장미를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일까?

아니면 저 곤충도 순백색 흰 장미에 사랑을 고백하는 걸까? 

 

장미의 연분홍 사연인가?

이미 장미의 몸에 안긴 곤충이 황홀하다.

 

 

코발트 빛 바다가 열리는 산책로 길에 화상이 그림을 팔고 있다.

그 자리에서는 인물화를 그려주며 생활을 유지해가는 이름모를 화가들이 저무는 노을을 아쉬워한다.

액자 가득 담긴 아름다움을 나그네는 카메라로 훔쳤다.

화가는 날 나무랄까?

그저 이 이상 나의 잘못은 확대되지 않으리라.

그럼 용서하려나......,

 

멋진 하늘에 또 어둠을 낚는 바다를 떠나 집으로 간다.

바다의 수평선 멀리 나도 수평선 한켠에 어둠을 따라간다.

그렇게 집으로 오는 길이 황홀하다.

어찌 저렇듯 깊은 사색의 향연으로 가득한 하늘을 보고 설레임을 멈출 수 있을까?

장미꽃이 만발한 하늘을 보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든 사연이 아름다운 날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