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 돋고 나뭇가지에 잎눈이 돋았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그러나 봄눈이 뜨고 떠오르는 햇살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겨울이 갔다. 거리에는 봄맞이 청소를 하고 화단을 가꾸는 일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벌어서 1년을 산다는 흑해의 관광도시 예빠토리야의 봄은 그렇게 오고 있다.
지난해 8월 임지로 결정된 예빠토리야에 올 때만 해도 낯설음이 전부였다.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일상적인 공간에서 새로움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여전히 계절이 가고 오는 변화 속에서 새로움을 보게 된다. 바다는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내 마음을 평온하게 다독여준다. 자연이 주는 선물은 참으로 오묘하고 깊고 크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낯선 나라의 풍경이 우리나라 팔도강산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다. 새싹이 돋고 잎눈이 돋는 것은 같지만, 산에 들에 봄꽃이 함께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쯤 남도의 산에는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꽃이 피어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마음 속에도 봄꽃이 피듯 아름다운 사연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필자의 마음 속에는 어둠이 밀려온다.
열의를 갖고 시작한 예빠토리야 고려인 한글학교의 한국어 강의는 이제 7개월을 넘게 진행되었다. 새해 수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만큼 학생들의 열의가 없어 안타깝다. 그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런데 그 동기부여조차 필자가 부여해주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이제 초등학생들인 아이들이 한국이란 나라의 위상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고 그것은 당연하다. 설령 위상을 안다 해도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리라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민족이라는 단어도 생소하게 듣는 그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무망하다. 그들이 강의 횟수를 더해가면서 한국어를 서툴게나마 한다는 것은 성취감도 있고 기분도 좋다. 그런데 그렇게 횟수를 더해가면서 더욱 더 부담이 커간다. 어느 만큼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 할지?
조상의 나라라는 것에 대해서 굳이 그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인지?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말해야 하는가? 막연하다. 막막하다. 온전한 조국이 아닌 것이 더욱 큰 부담이다.
몇 차례 지적했듯이 "왜, 남과 북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가?"라고 따지듯 물어오는 그들에게 한국에서 말하듯 이념문제로 갈등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경제적 편차가 심하고 문화적 갈등이 심하다고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제식민지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이후 해방전·후사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통일되지 못한 조상의 나라에서 온 필자는 죄인된 기분이다.
봄날이 왔다. 에빠토리야 시에서 지난 주말 경보대회가 열렸다.
얼마 전 있었던 예빠토리야 고려인협회 창립 5주년 행사에서 우리의 민요 하나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장기자랑을 한다고 일본가요를 부르는 것을 보고 입이 막혔다. 그들은 그만큼 조상의 나라에서 관심 밖에 있었던 세월이 길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간간히 동요를 가르쳤고 차차 민요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도 미안하다. 그들에게 일제시대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얼마나 깊이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일제와의 역사적 아픔을 안다면 그 노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소수민족들이 참관하고 있는 행사에서 더구나 고려인협회 창립행사에서. 그런데 필자는 그들을 탓할 수도 없다.
먼 조상의 나라에서 온 조상의 말을 가르치는 사람이 슬프다. 조국을 떠나며 눈물 흘렸을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그 아픔을 이어받아 왔지만, 본적도 모르고 정확한 성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추석을 알지만, 설날을 알지만, 세배하는 것을 몰라 가르쳤고 송편을 만들어 먹는 풍습을 몰라 가르쳤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말과 문화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안타까운 마음만 늘어간다. 언제쯤 조상의 나라에서 그들을 온전히 품어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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