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주 초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송인수(84) 할머니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 라즈돌로노예에 살고 있는 유일한 고려인 가족이 할머니와 아들 가족이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우리 말을 기억하고 있다. 아들 송알레그(53)는 출근하고 없었으나 통화 후 점심시간 짬을 내어 집을 찾아와 주었다. 우리말은 서툴렀지만, 말 전문 동물학자이다. 약국을 운영하는 며느리(벨라루시 사람) 그리고 손자 둘이 있다. 그중 큰 손자는 수도 키예프에 있는 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나이가 스무살이라고 했다.
할머니에게 찾아간 이유는 처음 만남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를 원했고, 그래서 찍어준 사진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 한국에서 떠나온 지는 멀고 멀어 기억에 없던 할머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우즈베키스탄을 그리워하며 우즈베키스탄 전통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필자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한국에 지인들이 보내준 한복을 선물하고 한복을 입은 모습을 사진 찍어드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자의 계획은 실패했다. 할머니는 필자가 방문하기 3일 전부터 한쪽 눈을 실명하여 외눈으로 생활을 하는데 아직 적응이 되지 않고 불편한 마음이 상심을 더한 듯했다.
필자가 전에 찍은 사진을 좋은 액자에 담아 드렸더니 흡족하게 받으셨으나, 한복만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 복잡한 마음을 다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의 신세 한탄이 겹쳐지는 것은 아닐까?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필자의 다른 일정으로 1시간 30분 거리를 때늦게 찾은 탓은 아닌가? 죄송하고 미안하고 안타깝다.
죄지은 마음을 하나 더 내 가슴에 얹는다. 그렇게 사양한 한복을 한 번 몰래 입어보셨는지? 필자가 건넬 때와 다르게 다시 곱게 접어서 봉지에 담아주셨다. 그 와중에도 집 마당 남새밭에 심었던 정구지를 담그셔서 밥을 내주시고 맑은 물을 떠다 주시며 밥상을 내미신다. 짧은 만남이지만, 두고두고 기억될 아련하고 아린 만남이 될 것 같다.
나는 할머니의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할머니의 그 모습에 식사를 거절 못하고 맑은 물에 흰 쌀밥을 말아먹었다. 정성을 다해 차려주신 정구지도 독한 맛을 느끼게 했다. 그 한 그릇의 밥에 나의 슬픔을 함께 말았고 슬픈 우리의 역사도 함께 말아먹었다. 역시 내 마음처럼 역사를 당겨 하나로 버무리는 데까지는 너무나도 멀고 먼 거리까지 와버린 것은 아닌가? 이미 한계상황에 처해버린 우리의 역사적 과거와 현재의 화해는 불가능해진건가? 이곳 고려인들에게 그래 난 역시 나그네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기력한 시인의 사색만 남은 것인가? 한 사람의 봉사단원에 불과한 무기력이 한탄스러웠다.
무슨 죄를 지은 것인지 분명하지도 않았지만, 필자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의 아린 흔적을 밟아 길을 걷는 나그네가 아닌가? 나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우리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그 자리에 이런 쓰라림과 아픔이 넘어설 수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일까?
아무튼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안녕을 비는 인사를 건넸다. 그의 아들이 버스터미널까지 안내하기 위해 차를 타고 시동을 거는 순간 멀리 할머니가 비닐봉지에 무엇인가 주섬주섬 담아 나오는데 필자를 태운 차는 손을 흔들 겨를도 없이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 할머니의 비닐봉지에 무엇이 담겨있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감싸고 다독여야할 슬픈 역사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아픔과 상처의 흔적을 치유할 서로를 향한 정성이 가득 모아져 있을 것이다.
그것에 담긴 것은 그 어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도 담아낼 수 없는 형제의 인연을 민족의 이름으로 소중하라는 가르침도 있으리라. 그 길로 가다보면 우리가 만나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통일 겨레의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통일의 길목에서 우리는 권력자들의 거만한 대의가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정성, 혹은 정의를 매몰차게 억압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의 편의적인 대의는 소박한 정성에서 나오는 소박한 정의를 배우지 못하는 한 미래는 여전히 어둠을 예고할 뿐이란 생각이다. 할머니의 비닐봉지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아들 송알레그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다음 여정은 다시 1시간 30분 거리의 고려인들의 집단주거지인 장꼬이다. 터미널에서 2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차를 탔다. 필자는 그곳에서 한 아이와 추억을 만들었다. 홀어머니는 터미널에서 식당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같은 정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한참 동안 그 아이 율랴(6)의 결핍을 달래주며 함께 놀아주었다.
그는 그런 틈에 그림낙서를 했다. 필자의 아들과 율랴의 딸이라며 네 명을 한 장의 낙서장에 그려서 선물이라고 내게 주었다. 아이의 엉뚱함에 라즈돌노예 버스터미널 사장(블라드미르)와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었고, 아이는 다음 여행지의 고려인을 만나러 가는 나의 슬픔을 씻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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