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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안나푸르나 12박 13일의 기록

8월 출간될 예정인 히말라야이야기의 머릿글

by 김형효 2007. 7. 15.

 

 신화의 땅, 네팔 안나푸르나 히말라야를 걷다.

- 해 뜨기 전, 어둑한 시간을 밝히는 사람들


내가 어릴 적 책에서 접한 히말라야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뿐이었다. 다른 히말라야의 이름들은 커가면서 상식수준으로 이름을 알아갔다. 그런 히말라야의 품에 오붓이 자리하고 있는 나라 네팔을 알게 된 것은 네팔인 이주노동자 덕분이다. 그때가 2004년 3월이다. 그 후 다섯 차례 네팔을 다녀왔고 언어를 익혔고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평범한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정치가를 만났고 교수들과 만났다. 그리고 히말라야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네팔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네팔 사람들 방식대로 보자면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보편적 인식체계가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좋을 법하다. 해석을 하면 할수록 곡해가 많아지는 것이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네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종교의 눈, 신화의 눈을 뜨고 산다. 아침이나 밤이나 잠들어 있거나 깨어 있거나 그들의 일상에서 종교란 벗어날 수 없는 끈이다. 종교 속에서 떠나고 종교 안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떠난 것도 없고 벗어난 것도 없이 종교 안에서 산책하는 수행자들이 그들이다. 그들과 수행의 길을 가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종교적 관습과 세속의 습관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히말라야를 걸으며 더 깊고 넓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여명! 해 뜨기 전, 어둑한 시간에 그들은 기도로서 아침을 맞는다. 뿌자(POOJA)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여명은 산스크리트어로 다. 후일에 는 기도라는 뜻으로 쓰였다. 여명은 기도라는 뜻이다.  새벽 네 시 도심 한복판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교회의 종소리도 어느 사원의 종소리도 아니다. 여명을 밝히며 뿌자 의식(기원의식)에 나선 어떤 힌두교도가 종을 치는 것이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기원에 나선다. 주로 여성들이 일어나 집집마다 마을마다 마련된 그들의 작은 신전에서 신께 기원을 올린다. 그들은 생명의 기원을 종교의 기원 의식에서 찾는 듯하다.


네팔인들은 집을 지을 때 신에게 기원할 공간을 따로 만든다. 그리고 집 정문에 그들의 신을 모신다. 절간에 들어설 때 보는 사대천황을 연상할만한 양식들은 네팔의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번잡스런 시장 통이나 대로변의 네거리에도 그들의 신전은 있다. 심지어 자전거를 이용해 만든 교통수단인 릭샤꾼들의 릭샤에도 택시 안에도 자가용 안에도 작은 삼륜차인 템포에도 있고 버스에도 화물차에도 그들의 신이 있다. 자본이 범람하고 유행이 퍼지면서 영화배우의 사진도 그 공간에 함께하고 있지만, 그들조차 신의 영역에 함께 있다는 차이 말고 신은 분명히 네팔인이 머무는 어느 곳에든 있다. 달리말해서 지극한 일상 속에 있다.

종일토록 뿌자(힌두교식 기원)의식에 몰입되어 있는 그들, 일 년도 짧은 듯하다. 날마다 행해지는 뿌자 의식, 거리를 걷다보면 문 닫은 가게들이 군데군데 있다.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번갈아가며 문을 닫는 가게들, 속내를 알고 보면 제 각기 행해지는 뿌자 의식 때문이다. 절박함에 날마다 그것도 새벽부터 행하고도 지칠 줄 모르고 행하는 일인가? 아이가 태어나도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그대로 지키며 기원을 멈추지 않고 길을 갈 때나 멀리 여행을 떠날 때나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사람을 대할 때나 언제나 철저하게 그들의 종교의식을 따르고 실천하고 있다. 힌두력 2062년(2006년 현재) 네팔 땅에는 상시적 불안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종교 안에서 평화롭다. 이러한 일상은 문화적으로 잘 뒷받침되고 있다. 대대로 이어져온 관성의 힘으로 잘 조직된 그들의 일상은 흔들릴 틈이 없는 것이다.

 


가난 속에서 한없이 깊어지는 종교에 대한 의지가 그들을 받쳐주고 있는 힘일까? 태어날 때부터 힌두교인이나 불교인이나 그들은 종교에 의해 태어나고 종교에 의해 지배받는 느낌이다. 네팔인 상당수는 힌두교인이라고 한다. 통계상으로 85%는 힌두교인이며 나머지 15%는 불교도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도 인정하지 못하는 통계다. 여행자의 눈으로 볼 때 더 많은 불교인들이 있는 듯하다. 어떻든 그들의 현실 권력인 왕권은 그 반열에서는 한참 먼 이야기 같다. 왕은 왕대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종교 앞에서 어떤 독재나 정치권력도 무의미한 일상에 불과한 듯하다. 왜냐하면 네팔인들이 그렇게 정치적 관심이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극심한 정치 투쟁이 진행되고 있고 더러 격렬한 시위도 있으니 그냥 단편적으로 말하는 데 무리가 있겠지만, 대중의 정서는 종교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들조차 종교의 틀 안에서 무기력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 한심할 정도로 무심한 사람들을 상대로 권력은 왜 처량 맞을 정도로 간교한가? 요즘 저공비행으로 카트만두 상공을 선회하며 사람들의 심장 박동을 멈추게 할 것처럼 무장한 헬리콥터가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날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심하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어쩌면 저 권력자는 저 무심함조차 이용하려 들 것이다. 이 한심한 사람들, 저들을 누가 구제하랴! 저 권력자들이야말로 구제받을 대상인 듯하다. 오히려 네팔의 보통사람들은 그들을 처량 맞고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미 그들은 권력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권력의 뒤끝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만난 네팔인 대부분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아마 저들은 총으로 지배하고 총으로 무너질 것이다. 이미 그 사실을 모든 네팔인들이 알고 있는 듯하다. 아마 권력자들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리라.


많은 날을 걸었다. 걸으면서 보았고 생각했고 외면했고 아파했고 쓰린 마음 달래며 절망했고 그러면서 다시 희망을 가졌다. 대체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이 지나칠 정도로 몰락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정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까? 대체 이 일을 나는 어찌 수습하려고 이러는가? 하루 동안 가고 오는 길이 너무나 멀고멀어 가도 가도 끝없이 느껴지더니 다시 돌아와 보니 제 자리 걸음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걸으며 보았던 수없이 아픈 사람들이 나마스떼라 말한다. 나마스떼란 말의 원래 뜻을 찾아보면 그것은 <신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데 그들은 눈물겨운 일상 속에서도 나마스떼라 인사한다. 


지나가던 이방인은 나마스떼라는 인사말에 굴복한다. 무서운 네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금방 웃어 주지 않았다면 슬피 울기라도 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토록 절박하게 웃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인 관광객의 입장에서 그 웃음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전파를 통해 그들에게 스며든 이해타산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 깊은 산골 안나푸르나의 길가에서 만난 소년, 소녀들의 눈길과 도시 카트만두의 것 그리고 포카라의 것은 다르다. 그것은 한 세기 혹은 반세기의 시대적인 착오가 동시대에 목격되고 있고 실존하고 있는 차이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나 산골이나 눈물 많은 이방인의 눈길에는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도 많이 목격된다. 어쩌면 나 혼자인 것처럼, 오직 나만이 홀로 외로운 사막에 마치 내동댕이쳐진 영혼처럼 아플 뿐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눈물겨울 정도로 밝은 웃음으로 대한다. 그저 홀로 처량하여 내가 외롭다. 어찌된 영문인가? 만능처럼 우러러 바라보아주는 그들이 고마워야 할 판인데 난 그들을 보면 가슴 아프고 그들은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인사한다. 마치 신을 영접하듯이 절묘한 예절인 듯하다.


네팔인들을 대할 때, 어려운 점들이 참 많다.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길 가던 동물이 도로에 드러누워 있어도 기다렸다 차를 움직여가는 그들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체면이나 정에 얽매이는 우리 민족의 습성으로 그들을 대할 때는 수없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웃는 얼굴, 처량 맞은 얼굴에 연민을 갖기 마련인 우리라면 무엇이라도 퍼주고 싶은 사람들이 네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눔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마냥 그런 식으로 대하게 되면 받지 못한 자가 화를 낸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마치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받지 못한 자는 화를 낸다.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들이 그런 예를 인도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인도인들의 습성도 비슷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낌에 익숙한 것만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거의 매일 있는 것으로 보이는 뿌자! 그때 그들은 닭을 잡아 기원하기도 하고 온갖 중요한 먹거리들을 정성스레 준비해서 그들의 사원으로 향한다. 그것은 낮이나 밤이나 여명에나 가릴 것 없다. 각자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카스트(종족)마다 필요한 시기에 뿌자(기원)를 올리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가 자그만 쟁반을 제법 멋을 낸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는 여인들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십중팔구 사원을 찾는 여인이다. 네팔 거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마 한 가운데 디까(꽃을 짓이겨 이마에 붙인 표시)를 한 수많은 네팔의 남녀노소를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전 국민이 다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불교 신자던 힌두교 신자던 거의 대부분 디까를 한다. 상대적으로 불교신자들은 덜하지만 말이다. 

 

 

 

히말은 그들에게 천상이다. 산 속에 살아있는 동물을 살아있는 신이라고 부르는 그들, 그들의 맑은 눈길을 대하고 보면 나 스스로가 천상의 길목에서 살아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든다. 그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진정으로 낙원을 누리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네팔 사람들, 그들은 지금 모두 샹그릴라로 가고 있다. 나도 따라 걷고 있다. 풍요의 여신인 안나푸르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