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네팔 사람들 방식대로 보자면 그냥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해석을 하면 할수록 곡해가 많아지는 것이 어떤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더더욱 확실한 이해의 방법이다.
네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종교의 눈을 뜨고 산다. 아침이나 밤이나 잠들어 있거나 잠깨어 있거나 그들의 일상에서 종교란 벗어날 수 없는 끈이다. 낯선 이방인의 눈으로 보자면 종교 속에서 떠나고 종교 안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으로 보여진다. 그러니 결국은 떠난 것도 없고 벗어난 것도 없이 언제나 종교 안에서 산책하는 수행자들이 그들이다.
여명! 해 뜨기 전, 어둑한 시간에 그들은 기도로서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뿌자(POOJA)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여명은 산스크리트어로
네팔인들은 집을 지을 때 신에게 기원할 공간을 따로 만든다. 그리고 집 정문에 그들의 신을 모신다. 절간에 들어설 때 보는 사대천황을 연상할만한 양식들은 네팔의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번잡스런 시장 통이나 대로변의 네거리에도 그들의 신전은 있다. 심지어 자전거를 이용해 만든 교통수단인 릭샤꾼들의 릭샤에도 택시 안에도 자가용 안에도 그들의 신은 존재한다. 작은 삼륜차인 템포에도 있고 버스에도 화물차에도 그들의 신이 존재한다. 자본이 범람하고 유행이 퍼지면서 영화배우의 사진도 그 공간에 함께하고 있지만, 그들조차 신의 영역에 함께 존재한다는 차이 말고 신은 분명히 네팔인이 머무는 어느 곳에든 존재한다. 달리말해서 지극한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일토록 뿌자(힌두교식 기원)의식에 몰입되어 있으니 일 년도 짧은 듯하다. 날마다 행해지는 그것도 새벽 네 시부터..., 거리를 걷다보면 문 닫은 가게들이 군데군데 있다.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번갈아가며 문을 닫는 가게들, 속내를 알고 보면 제 각기 행해지는 뿌자 의식 때문이다. 절박함에 날마다 그것도 새벽부터 행하고도 지칠 줄 모르고 행하는 일인가? 아이가 태어나도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그대로 지키며 기원을 멈추지 않고 길을 갈 때나 멀리 여행을 떠날 때나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사람을 대할 때나 언제나 철저하게 그들의 종교의식을 따르고 실천하고 있다. 힌두력 2065년(2008년 현재) 네팔 땅에는 상시적 불안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종교 안에서 평화롭다. 이러한 일상은 문화적으로 잘 뒷받침되고 있다. 대대로 이어져온 관성의 힘으로 잘 조직된 그들의 일상은 흔들릴 틈이 없는 것이다.
가난 속에서 한없이 깊어지는 종교에 대한 의지가 그들을 받쳐주고 있는 힘일까? 태어날 때부터 힌두교인이나 불교인이나 그들은 종교에 의해 태어나고 종교에 의해 지배받는 느낌이다. 네팔인 상당수는 힌두교인이라고 한다. 통계상으로 85%는 힌두교인이며 나머지 15%는 불교도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도 인정하지 못하는 통계다. 여행자의 눈으로 볼 때 더 많은 불교인들이 있는 듯하다. 어떻든 그들의 현실 권력인 왕권은 그 반열에서는 한참 먼 이야기 같다. 왕은 왕대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종교 앞에서 어떤 독재나 정치권력도 무의미한 일상에 불과한 듯하다. 왜냐하면 네팔인들이 그렇게 정치적 관심이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극심한 정치 투쟁이 진행되고 있고 더러 격렬한 시위도 있으니 그냥 단편적으로 말하는 데 무리가 있겠지만, 대중의 정서는 종교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들조차 종교의 틀 안에서 무기력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날을 걸었다. 걸으면서 보았고 생각했고 외면했고 아파했고 쓰린 마음 달래며 절망했고 그러면서 다시 희망을 가졌다. 대체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이 지나칠 정도로 몰락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정을 나는 어떻게 설명할까? 대체 이 일을 나는 어찌 수습하려고 이러는가? 하루 동안 가고 오는 길이 너무나 멀고멀어 가도 가도 끝없이 느껴지더니 다시 돌아와 보니 제 자리 걸음이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걸으며 보았던 수없이 아픈 사람들이 나마스떼라 말한다. 나마스떼란 말의 원래 뜻을 찾아보면 그것은 <신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데 그들은 눈물겨운 일상 속에서도 나마스떼라 인사한다.
지나가던 이방인은 나마스떼라는 인사말에 굴복한다. 무서운 네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금방 웃어 주지 않았다면 슬피 울기라도 했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그토록 절박하게 웃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인 관광객의 입장에서 그 웃음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전파를 통해 그들에게 스며든 이해타산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 깊은 산골 안나푸르나의 길가에서 만난 소년, 소녀들의 눈길과 도시 카트만두의 것 그리고 포카라의 것은 다르다. 그것은 한 세기 혹은 반세기의 시대적인 착오가 동시대에 목격되고 있고 실존하고 있는 차이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나 산골이나 눈물 많은 이방인의 눈길에는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도 많이 목격된다. 어쩌면 나 혼자인 것처럼, 오직 나만이 홀로 외로운 사막에 마치 내동댕이쳐진 영혼처럼 아플 뿐이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눈물겨울 정도로 밝은 웃음으로 대한다. 그저 홀로 처량하여 내가 외롭다. 어찌된 영문인가? 만능처럼 우러러 바라보아주는 그들이 고마워야 할 판인데 난 그들을 보면 가슴 아프고 그들은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인사한다. 마치 신을 영접하듯이 절묘한 예절인 듯하다.
네팔인들을 대할 때, 어려운 점들이 참 많다.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길 가던 동물이 도로에 드러누워 있어도 기다렸다 차를 움직여가는 그들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체면이나 정에 얽매이는 우리 민족의 습성으로 그들을 대할 때는 수없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웃는 얼굴, 처량 맞은 얼굴에 연민을 갖기 마련인 우리라면 무엇이라도 퍼주고 싶은 사람들이 네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눔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마냥 그런 식으로 대하게 되면 받지 못한 자가 화를 낸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마치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받지 못한 자는 화를 낸다.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들이 그런 예를 인도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인도인들의 습성도 비슷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낌에 익숙한 것만은 아니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거의 매일 있는 것으로 보이는 뿌자! 그때 그들은 닭을 잡아 기원하기도 하고 온갖 중요한 먹거리들을 정성스레 준비해서 그들의 사원으로 향한다. 그것은 낮이나 밤이나 여명에나 가릴 것 없다. 각자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카스트(종족)마다 필요한 시기에 뿌자(기원)를 올리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가 자그만 쟁반을 제법 멋을 낸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는 여인들이 보일 것이다. 그들은 십중팔구 사원을 찾는 여인이다. 네팔 거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마 한 가운데 디까(꽃을 짓이겨 이마에 붙인 표시)를 한 수많은 네팔의 남녀노소를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전 국민이 다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불교 신자던 힌두교 신자던 거의 대부분 디까를 한다. 상대적으로 불교신자들은 덜하지만,
천상의 길목에서 살아가는 듯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진정으로 낙원을 누리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네팔 사람들, 그들은 지금 모두 마낭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수많은 네팔 사람들, 아니 거의 대부분의 네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마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들에 의해 마낭은 지상 유일의 낙원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샹그릴라 마낭! 그래서 그들 모두는 지금 천상의 길목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천상으로 가는 계단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 행동, 이방인의 눈에 잡힌 모습은 그들이 삶에 있어서 가난도 근심도 잃은 것처럼 달관한 모습이다. 그러니 어쩌면 천상으로 가는 그런 믿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천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는 착각이나 확신을 갖고 있으리라.
거리를 걷다가 수많은 걸인들을 만나게 된다. 길을 걷다보면 무릎이 잘려나간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고, 무작정 방치된 듯 보이는 어린 소년, 소녀가 소리쳐 구걸을 하고, 그 사이로 이방인들의 찬란한 발길이 이어지고, 이미 익숙한 네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걷는다. 가난에 길들여진 그들이지만, 굶주림을 참기란 힘든 일, 택시를 타고 가다 차가 잠시 멈춰선 틈에 창문으로 손을 내미는 어린 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 아픔을, 바라보는 사람만 무심한 그들이 신비롭다. 그들은 철저한 힌두의식으로 일년을 산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다.
아픔을 노래하라
김형효
아무렇지 않구나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이제 더 이상 잃을 것 없어
아무렇지 않구나
당신이 날 보고 아프거든
나를 잊어라
당신이 날 보고 사랑스럽거든
나를 잊어라
아무렇지 않구나
이제 나 더 이상 잃을 것 없으니
당신이 갖고 싶은 것 있거든
모든 것을 버려라
버리는 순간
버린 만큼 채워지리라
당신이 당신을 믿는 만큼
신도 당신을 믿어 주리라
절묘하고 기묘하구나.
가려거든 가거라.
가는 만큼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온전하구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태로
공허한 허공 속을 바라보는 눈
맑고 맑구나.
네팔 역사상 최고의 시인 럭쓰미 쁘러싸다 데보코타는 그런 아픔을 정글을 비교해서 노래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사는 땅, 인간이 사는 숲 속, 허망과 절망 사이에서 허덕이는 영혼을 갖고 살기 힘든 시인이 정글이란 시를 통해 자신의 조국의 현실을 읊조린 것은 아닐까?
JUNGLE(정글)
럭스미쁘러싸다 데보코타(Laxmi Prasad Devkota)
D.O.B 1966(B.S) ~ D.O.B 2061(B.S), 서기 1909년~1959년
구술번역 김형효, 네팔인 디네스 히라천
Life was crying in the middle of jungle with full of tears
생명이 울고 있다. 숲 속에 눈물이 가득하다.
could find no-where in the middle of my heart.
내 마음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On the broken hopes there were eyes of sorrows
거기 마음에 상처를 간직한 슬픈 눈이 있다.
Don't know where the sadness and sorrows of my heart.
내 마음에 슬픔이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다.
'내가 사는 세상 > 나의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성(神聖)의 땅, 네팔에 가다(4) (0) | 2008.02.09 |
---|---|
신성(神聖)의 땅, 네팔에 가다(3) (0) | 2008.02.07 |
신들의 땅 네팔, 카트만두 거리를 사색하다. (0) | 2008.02.04 |
룡악산 식당-길림에 있는 북한 식당 (0) | 2008.01.29 |
2007년12월31일 저녁 수원 화성 모습 (0) | 2008.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