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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머저리' 연발하는 게오르기 형님, 왜 그러시나요?

by 김형효 2009. 8. 6.

'머저리' 연발하는 게오르기 형님, 왜 그러시나요?
집 안에 사는, 내 나라 땅 안에 사는 우리가 '머저리' 아니었는가?
김형효 (tiger3029) 기자

첫 번째 임지였던 니꼴라예프에 하루는 길기만 했다.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는데도 기다림이 지루한 것이었던 것 같다. 짐을 다 싸두지도 않고 맞이한 니꼴라예프의 우크라이나인 친구들과 한국식으로 점심을 함께 하고는 작별인사를 나눈 후, 짐을 쌀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일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서 나는 새로 부임하는 한국어 강사를 소개해주고 싶어졌다. 그들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소개를 받고 싶다고 해서 기다림이 긴 시간이지만, 그 동안 한국영화를 보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러시아로 더빙이 되어있는 영화 <천년학>을 보여주었다.

 

  
▲ 왼쪽은 예브게니(줴냐,22세) 오른쪽은 그의 여동생 카트리나 다시 그들과 해바라기 밭을 찾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니꼴라예프를 떠나는 날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예브게니는 작별인사를 나누는 나의 초대에 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전통춤과 음악, 그리고 역사를 알 수 있는 영화를 DVD에 담아서 전달해주었다. 고마운 만남이었고 나중에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 김형효
니꼴라예프의 예브게니와 카트리나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후 새로 임지를 배정받아 도착한 분을 소개하고 함께 앉아 커피 타임을 갖고 마무리 짐을 챙겼다. 택시를 대절하고 남는 시간은 20분 정도! 그런데 이민용 가방이 너무 커서 일반 택시의 트렁크에 실어지질 않는다. 다른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는 데 초조하기만 하다. 버스 출발 시간이 15분전이다.

 

가까운 버스터미널이지만, 길 떠날 사람에게 정해진 시간이 가까워 올 때까지 행선지에 가닿지 못하면 여유를 갖기는 쉽지 않다. 낮에 넘쳐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여유를 찾을 수 있으련만 지금 그런 생각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렵게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 사람 좋은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출발 5분전에 짐을 다 싣고 버스에 곧 바로 올라탔다. 7시간 30분을 버스를 타야 한다. 저녁 9시 10분 버스를 탔는데 새벽 4시 30분 도착예정이다.

 

어렵게 버스를 타고 3개월 동안의 니꼴라예프 생활을 까맣게 잊고 새로운 예빠토리야의 고려인들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다. 그들을 만날 설레임만 가득하고 기대로 마음이 들 떠 있다. 새벽에 밤 하늘 별을 보면서 낯선 몇 곳의 경유지를 거쳐 예빠토리야에 도착했다.

 

환송객들이 차를 세우는 주차장에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이 새벽잠을 깨고 게오르기 형님 차 안에 앉아있다. 반가운 마음에 버스 창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는데 알아보지 못한다. 편한 마음이 되어 차에서 내리는데 게오르기(54) 형님이 두리번거리며 버스가 선 차부로 걸음을 재촉해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손을 마구 흔들어댄다. 아직 잠이 덜 깨셨는지 바로 알아보지 못한다. 잠시 후 필자를 알아보고는 "안녕히 오시었소!"라고 서툰 우리말로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동생! 잘 다녀왔어!"라고 말씀하시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이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앞으로 기약된 19개월을 살뜰히 살아갈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아직도 밤 하늘 별이 반짝이는 새벽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 곧 짐을 게오르기 형님네 집 3층에 옮겨놓고 커피를 한 잔씩 한 후 헤어졌다.

 

  
▲ 게오르기의 집에서 본 일출 게오르기 형님 집에 도착해서 아침 잠을 청하기 전에 흑해를 차고 떠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 김형효
흑해의 일출

필자는 이곳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고려인들과 가깝게 부르고 싶으신 분들을 저녁에 초청하시라고 두 분에게 말씀을 전했다. 저녁 식사를 한국식으로 하자는 제안이었다. 두 분이 흔쾌히 허락하고 저녁에 뵙기로 하였다. 아침이 밝아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50) 누님은 업무를 시작한다고 하고 게오르기 형님은 좀 더 주무셔야겠다고 했다. 나도 곧 샤워를 한 후 잠을 청했다.

 

아침이 밝아오는 흑해를 차고 떠오르는 동녘의 해를 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잠을 청한 것으로 생각되는 편안한 아침 시간이다. 오전 10시 30분이다. 곧 게오르기 형님이 잠에서 깨어나셔서는 아침밥을 챙겨주신다. 맛있는 된장과 고추, 그리고 오이를 썰어서 내놓았다. 아침밥을 된장에 고추나 오이를 찍어먹는 것은 내 식습관과는 다르다. 그런데 하나같이 맛좋게 내 입맛을 당긴다. 아마도 마음의 길을 튼 탓이리라! 

 

식사를 하고 형님은 형수님이 운영하는 카페에 가져갈 분식 반죽을 하시고는 함께 나가자고 하셨다. 길을 가다 급하게 샛길에서 끼어들며 무리하게 페달을 밟은 자동차가 공회전을 하며 "부웅! 붕!"하고 싫은 소음을 내자, 형님께서 주저없이 "머저리!'라고 말씀하신다. 난 깜짝 놀랐다.

 

  
▲ 예빠토리야에서 초대한 고려인과의 저녁 식사 예빠토리야로 부임한 첫날 저녁식사에 현지 고려인들을 초대했다.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누님과 게오르기 형님이 초대를 대신했다. 가운데 앉아있는 이가 아르춈(60세), 식사를 마친 후 대화중이다.
ⓒ 김형효
고려인과의 저녁 식사

형수님에게 재료를 전한 후 저녁에 요리할 닭과 배추, 파를 사려고 시장을 가는 길에도 무리한 앞지르기를 하거나, 조심성 없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머저리!"라고 말씀하셔서 연거푸 당황스러운 눈길을 보내고는 그 말씀은 어찌 배우셨느냐?고 여쭈었더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사람노릇에 어긋나면 곧잘 하시던 말씀이라고 하신다.

 

저녁에는 제법 큰 닭 세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닭도리탕을 하고 두 마리는 찜닭으로 요리를 했다. 된장국도 끓이고 배추 겉저리도 담궜다. 두루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큰 형님 게오르기(60)와 이랴(59) 부부는 차편 때문에 오시지 못하고 아르촘 형제와 플로리다 누님 그리고 또 다른 악사나라는 한 분이 함께 자리했다. 내가 준비한 와인으로 건배를 하고 노트북을 켜서 우리 전통음악을 듣거나, 사극 태왕사신기, 대장금 등을 번갈아 보면서 우리의 느낌을 공유하고자 했다.

 

  
▲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50세) 예빠토리야 고려인 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앞으로 예빠토리야의 고려인들과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 중인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 그녀가 갖는 열성으로 예빠토리야 고려인들이 더욱 활기를 찾은 느낌이다. 그녀는 특별히 한국 여성들의 한복을 2~3벌이라도 가져다 줄 수 없는가? 물었다. 필자는 차차 알아보겠다는 말씀을 전했다.
ⓒ 김형효
김 플로리다 바실리예브나(50세)

  
▲ 담소중에 사진 한 장을 청했다. 첫날 모임이다. 첫 식사시간을 기념하고자 한 장의 사진을 찍자고 제안해서 짂은 사진이다. 앞으로 에빠토리야 고려인 인명사전을 함께 만들자고 했다.
ⓒ 김형효
예빠토리야 고려인과 함께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모인 자리여서인지 즐겁게 자리를 마쳤다. 그리고 마무리는 게오르기 형님이 낮에 준비한 커다란 수박을 잘라먹었다. 수박을 커다란 냉장고에서 꺼내다가 워낙 큰 수박의 하중을 이기지 못해 냉장고 칸막이가 부서질 정도였다. 앞으로 한글을 배우면서 가끔씩 사극이나 다른 드라마를 시청하시면서 배우시면 그렇게 어렵지 않으실거라는 말씀을 전했다.

 

반백이 되신 어른들이 손자, 손녀에게 한글을 배우라시면서 함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날 눈물짓게 하는 날들이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오셔서 덕분에 우리가 고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나는 그때마다 영문 모를 죄의식이 든다. 내가 받는 인사가 합당한가? 어쩌면 우리네 집안에 사는 내 나라 땅 안에 사는 우리가 "머저리!"는 아니었는가?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