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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톨스토이 문학작품 배경이었던 세바스토폴에 다녀왔습니다.

by 김형효 2009. 10. 30.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이력이다.

그는 러시아의 작가이며 귀족 출신이었다.

 

1853년 크림 전쟁에 종군하였으며, ´유년 시대´(1852), ´소년 시대´ ´청년 시대´(1857)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를 군대 생활 중에 썼다. 1857년 유럽을 유람하고 귀국한 후에는 학교의 설립, 교과서의 편찬에 종사했고, 자유주의적 진보주의로 기울어졌다. 1869년 나폴레옹 전쟁을 주제로 한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였다.

 

1873년 ´안나 카레니나´로 귀족 사회를 묘사했으나, 이 즈음부터 종교적인 번민에 빠졌고, 1882년에는 ´참회´를 발표, 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1884)를 써서 사랑과 무저항주의를 역설했다. 1900년 ´산 송장´ ´부활´을 썼으나, 자신은 사회적 모순과 허위 생활에 대한 고민 끝에, 집을 나와 아스타포보의 시골 역 역장 집에서 객사하였다.

 

벼르고 벼르던 세바스토폴을 찾았다.

예빠토리야에서 버스편으로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는 말을 버스터미널에서 운전기사를 통해 들었다.

실제는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정확하게 세바스토폴이라는 도시로 가는 버스는 세베르나야(СЕВЕРНАЯ)에 도착했다.

 

아침 9시 2분 버스를 타고 낮 11시에 도착한 것이다.

곧바로 모든 승객이 배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항만이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서 바다의 느낌보다는 작은 호수처럼 보였다.

항구에서 낚시질을 하는 모습은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버스터미널 주변에서는 바로 러시아 국기와 우크라이나 국기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이곳이 수많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항구라는 사실은

인근 부대와 중소형 군함을 보지 않았다면 믿기지 않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며 바닷가를 걸으며 바다 건너편을 카메라에 담았다.

10여분 산책을 하다 이내 120여명은 승선할 수 있을 것 같은 배에 올랐다.

낭만이 넘치는 공간이라......, 홀로 왔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풍요로운 사색도 즐거운 여행자의 행복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사실 우크라이나에 와서 처음으로 오르막과 내리막을 달리는 버스를 타보았다.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 뿐이다.

그런데 근 8개월만에 처음으로 오르막내리막이 있는 길이었다.

제주도의 오름을 생각하면 아마 비슷할 듯하다.

사실 세바스토폴 인근에 도로에서부터

멀리 등고선이 그어지며 산과 햇살이 구분지어지는 산이 보였다.

오르고 싶다는 생각도 하였으나 초행길이고 다섯시간이라는 짧은 여정이라서 시내를 중심으로 걷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해군병사들이 건너편을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정말 맑은 바다다. 카메라에 물고기가 어항속처럼 선명하게 잡혔다.

구 러시아의 역사였고 우크라이나의 역사였던 곳에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기단부에 전시에 상부로부터 작전지휘를 받는 분위기의 조형물이 사방에 있었다. 

우크라이나 군인 게오르기~! 통화중인 그에게 사진을 한 장 찍자고 말을 건넸다.

흔쾌히 응한 그와 그의 친구가 함께 모델이 되어주었다.

흑해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시민과 여행객들......, 수상카페라 할까? 노상카페라 할까?

아니 지상낙원이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하다.

공원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율랴~!

그녀의 작품인가 물었더니, 자신의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작품가격은 100달러 선이었다.

세바스토폴 시내에서 높은 지형에 성당과 레닌이 흑해를 향해 나가자!듯 팔을 치켜든 동상이 보인다. 

거대한 조형물이었다. 2차대전 참전용사들의 승전탑이다.

앞부분에 수많은 꽃들이 바쳐져 있고 꺼지지 않는 불길이 우리네 향로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시장이다. 이곳에서도 고려인들이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와서 처음으로 대봉 홍시감을 보았다.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감 값보다 비싼 바구리에 감을 사서 넣어 왔다.

난 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홍시감은 가끔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