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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얄타를 가다(3)

by 김형효 2009. 11. 9.

남북분단을 결정지었던 <얄타회담>이 열렸던 건물로 독재자 짜르의 별장이었다. 

 

민족의 상처, 민족분단을 가져온 기분 나쁜 역사의 현장을 가다.

 

안톤 체홉의 집은 멋진 별장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작가 체홉이 폐결핵을 앓다가 결국 그곳에서 5년여를 보낸 후 생을 마감했다는 곳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는 동안 체홉이 이곳에서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끼와 교류하며 어울리던 곳이었다.

더구나 작가로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지냈던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여유 있게 체홉의 벤취에서 사색을 즐기다가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곱씹는 시간도 즐겁다.

아직은 우크라이나에 머물며 인근 도시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여유를 주는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선다. 즐겁고 느긋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그 집 밖에서 보이는 주변을 둘러본다.

집도 요새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숲속이었지만, 집 주변도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고

체홉의 집은 암닭이 품은 알처럼 깊은 곳에 보금자리에 안긴 형상이다.

따뜻한 평온이 자리잡고 있는 동굴 속 같은 곳이었다.

 

 

안톤 체홉의 집은 울창한 산림안에 도로가 나있을 뿐 숲속의 요새같은 곳이었다.

 

니꼴라이는 내게 안톤 체홉의 일대기를 CD로 제작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살 것인지 물었다.

25그리밴이다. 한화 3500원 정도 하는 돈이다. 우크라이나 물가를 생각하면 싼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 사둘까 하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찾을 것을 그때 가서 보자는 마음으로 그냥 나왔다.

곧 니꼴라이는 리바디야(ЛИВАДИЯ)로 가자며 승차해줄 것을 청했다.

 

조금 높은 도시의 중턱에서 내리막길을 달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오르막길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택시 안에서 바라보이는 얄타는 환상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찌 보면 동굴 속처럼 구릉이 깊고

다시 솟아오르는 오르막을 달릴 때 바라보이는 바다의 푸른빛은 마음을 무한히 풍요롭게 하는 느낌을 주었다.

 

리바디야의 조경수다. 오래된 향나무가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곳의 역사가 오래된 곳이란 것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했다.

 

오르막을 달리던 택시가 얕은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정면으로 흑해의 푸른빛이 내게 달려드는 느낌이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그곳이 바로 러시아 짜르 황제(표트르대제)의 궁전이었으며

우리에게 민족분단의 슬픔을 안겨다준 얄타회담이 열렸던 리바디야(ЛИВАДИЯ)라는 곳이다.

 

기분 나쁜 그런데 난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심리로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

이 자리가 자랑스런 장소도 아니고 그냥 경치를 좇아 온 것 만도 아니다.

아무튼 이곳을 와보고자 한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를 막상 현지에 도착해서 생각하게 된다.

막상 쉽게 답이 나오질 않는 의문스런 심리이다.

순간 멍청해진 심리상태로 관성적인 걸음을 움직여 걸어 들어갔다.

 

그때도 습관적인 여행자의 의무처럼 카메라셔터를 눌러대면서......,

순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정지된 사색은 멋진 풍경에만 빠져들게 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을 안겨다 준 것 말고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빼어난 곳이다.

그때 다시 나의 사색을 이끈 것은 나와 닮은 모습을 한 부부를 만나면서다.

잠시 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들도 생김이 같은 나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왔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은 여행 온 고려인 부부였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말을......,

그러다 내가 먼저 "야 김! Я КИМ!(나는 김이다)".

"깍 바스 자붓? КАК ВАС ЗАВУТ?(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때 순간적으로 나오는 우리 말이 유가이~! 이곳의 많은 고려인들의 어법이다.

나가이, 유가이, 강가이......, 그러니까? 그 부부의 남편 성씨가 유 씨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고개를 반쯤 젖혔다가 바로 세우며 하는 말이

"안, 안녕하, 안녕하세, 요, 요."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나온 말이다.

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쓰시던 말이고 자신은 배운 적이 없다고 미안스럽게 겸연쩍어 하신다.

 

 

고려인 유씨 부부와 필자~! 항상 건강하시고 내내 행복한 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은 저렇게 단절된 우리말처럼 여전히 단절된 역사의 질곡을 거슬러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언제쯤 저 고려인의 입에서 끊어져버린 단절로 "안녕하세요!"라고 단방에 우리말을 해낼 수 있는 시절이 올까?

순간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때 곁에 있던 니꼴라이 아저씨에게 모즈너 포토그라피? (МОЖНО ФОТО ГРАФИЛ?)우리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리고 이 장소에 대해서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니꼴라이는 그런 우리 모습을 여전히 사람 좋은 인상을 하며 바라봐 주었다.

 

동족끼리 불편한 사색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재치를 발휘한 슬픈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안녕을 빌면서 작별을 고했다.

마음 같으면 이런 우리의 동포들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그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정부에 보고를 하면

정부에서는 그들의 신원을 파악해서 그들의 생활에 대해 실태를 조사하고

필요한 민족 교육이나 삶의 질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것이 꿈같은 상상이 아니라 머지않아 현실이 되어 사해(四海)의 동포들이 서로 어깨 걸 수 있게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