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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내가 만난 세상 이야기

장꼬이 고려인들과 보낸 3박 4일(마지막회)

by 김형효 2010. 7. 29.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10)

 

 

 

▲ 나줴즈다(39세)와 게르만장의 결혼 사진 우크라이나인 여성과 고려인, 벨라루시나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러시아인 등 정말 다양한 민족과 가정을 이룬 고려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 곁에 한민족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김형효
나줴즈다(39세)와 게르만장의 결혼 사진
  
▲ 게르만장과 그의 가족 게르만장은 그의 아내 나줴즈다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둔 가장이다. 큰 아들 알렉스장(15세)과 둘째 아들 블라디슬라브(11세)가 있다. 빨간 옷을 입은 큰 아들 알렉스장이 축구선수다.
ⓒ 김형효
게르만장과 그의 가족

게르만장(장꼬이 고려인협회장, 43세)은 장경남 선생과 정조야 그레이츠스키 여사 사이의 3남중 막내다. 게르만장은 1996년 오데사에서 우크라이나인 여성 나줴즈다(39세)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나줴즈다는 미모의 여성으로 항상 밝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연애시절 자신이 먼저 결혼하자고 했다며 밝게 웃었다. 필자는 그녀가 지난 2월 장꼬이 고려인협회 15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고려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보았다.

 

장꼬이는 앞서 기술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인 거주지다. 장꼬이에는 약 5만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 고려인은 1500명에서 2000여 명이다. 그러나 이는 대략적인 통계일 뿐 확실한 수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 계속 이주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대부분 농사일로 생활해 나가는 것처럼 게르만장도 농토를 가지고 있다. 그는 140헥타르(40만평)정도 되는 농토를 현지 우크라이나이인에게 임대를 주었다고 했다. 그의 두 형님도 대부분 장꼬이 고려인들처럼 고추와 토마토, 양파, 수박, 오이 등의 농사를 짓고 있었다. 

 

  
▲ 한국에 연수갔을 당시 기념 촬영 지난 2007년 우크라이나 고려인초청 시설채소재배 기술연수가 있어 한국에 다녀온 일은 그에게 고마운 조국의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 김형효
한국에 연수갔을 당시 기념 촬영
  
▲ 양배추 종묘 게르만장이 임대준 농지에 양배추 종묘가 잘 자라고 있었다. 정말 광활한 농지다. 푸른 농지와 하늘이 맞닿는다.
ⓒ 김형효
양배추 종묘
게르만장도 한때는 적극적으로 농사일을 했다고 한다. 지난 2007년 우크라이나 고려인 초청 시설채소재배 연수가 있어 한국에 다녀온 일은 그에게 고마운 조국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 했다. 기억할 일이 없는 조국과 기억할 자리가 있는 고려인이 느끼는 조국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그가 다녀온 조국에 어려운 조건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게나김도 다녀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해질 무렵 게르만장과 그의 농지를 구경하러 갔다. 장꼬이 시내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드넓은 농토가 있었다. 물론 우크라이나 어디든 시내와 시외 구분없이 광활한 대지가 있다. 나는 특별히 그의 땅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해가 저물어가는 붉은 아름다움이 하늘을 뒤덮는 시간이었다. 그곳에는 땅을 임대한 우크라이나인이 살고 있었고 우리가 도착하자 안내를 해주었다. 트렉터와 농기계들이 농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 게르만장이 밀작황을 살피고 있다. 게르만장이 밀밭의 밀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농사꾼 노릇을 했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 김형효
게르만장이 밀작황을 살피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 잃은 동포들에게 조국의 우리는 무엇을 했나

 

그곳에는 양배추 종묘를 해두었고 밀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고랑도 구분하기 어려운 그곳에 마늘밭, 양파밭 그리고 밀 수확을 끝내고 밭갈이를 해둔 밭이 붉은 노을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절로 풍요로워지는 시간이다. 그대로 다시 게르만장의 집으로 초대되어 갔다. 낮술을 마신 탓에 저녁을 먹고 곧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 틈에 게르만장의 아이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게르만장은 그의 아내 나줴즈다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둔 가장이다. 큰 아들 알렉스장(15세)과 둘째 아들 블라디슬라브(11세)가 있다. 큰 아들은 유소년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축구팀 일원으로 프랑스에 전지훈련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축구선수로 활동하는 큰 아들에 대해 기대가 큰 듯했다. 그의 아들은 우리들의 대화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 남북이 모두 진출한 사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국이 진출 못한 것을 비교하며 남북 공동 진출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 축구 선수 알렉스장과 그가 받은 메달 게르만장은 과묵한 사람이다. 말수가 적은 그도 아들이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받아온 자랑은 빼놓지 않았다.
ⓒ 김형효
축구 선수 알렉스장과 그가 받은 메달
  
▲ 축구선수 아들의 프랑스 전지훈련 당시 사진 축구선수 아들의 프랑스 전지훈련 당시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 끝이 알렉스장이다.
ⓒ 김형효
축구선수 아들의 프랑스 전지훈련 당시 사진

게르만장은 '안타깝다'고 했다. 과묵한 그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여러 차례 말문을 열어보려고 노력했다. 느리게 말을 잇는 그는 한국의 문화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열망을 털어놨다. 그러나 그도 다른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희망의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에 바랄 수 있는 그림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무엇을 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이란 언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매년 반복하는 고려인협회 창립기념일과 매년 열리는 전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주최의 고려인문화축제(까레야다)만이 그들이 민족을 인식하는 정체성의 범위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 남은 것이 없다. 민족성원으로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한민족이라면서 말도 못하고 고추장도 모르고 무엇도 모른다고 하기 전에 아는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했는가? 먼저 반성해야한다.

 

그런 점에서 해외에 동포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은 것은 우리들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먼저 우리는 해외동포들이 무엇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조국의 사람들이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지킬 수 있는 영역은 한계 속에 있다. 그들이 버텨낼 수 없고 지킬 수 없는 조건일 때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우리들이 지켜야 할 것을 망각한 사람들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란 생각이다. 고려인협회장 게르만장과의 이야기에 필자의 반성을 더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불편스런 사색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조국이 온전해질 때까지는…

 

장꼬이 태권도 사범 게나 이야기

누가 좀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둘째 날 필자는 잠시 장꼬이 5번 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는 고려인 게나김(35세)을 만났다. 그는 태권도 1단이라고 했다. 태권도 1단인 그가 태권도 사범으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필자가 아는 바로 한국은 사회체육 개념으로 공인 4단 이상이 되어야 체육관을 차릴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1단으로도 사범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키예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에서 온 태권도 6단의 봉사단원의 이야기로는 태권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동기부여가 안 되고 있는 것이 우크라이나 태권도 발전을 저해하는 것 같다고 한다.

 

  
▲ 게나의 부인 미나와 두 아들 어렵게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가정을 이끌고 있는 게나김이 자랑스럽다. 게나김은 우크라이나인 아내 미나(30세)와의 사이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가장이다. 어린 딸은 낮잠을 자고 난 후라 사진을 함께 찍지 못했다.
ⓒ 김형효
게나의 부인 미나와 두 아들

늦은 오후 6시지만 아직도 40도를 넘나드는 뙤약볕이 든다. 무더운 날씨에 게나김이 태권도장에 가는 길에 그의 둘째아들 게르만김(9살)과 함께 5번 학교를 찾았다. 그곳이 게나김이 오전에 비디오 촬영 일을 마치고 나면 태권도를 가르치는 곳이다. 게나김은 우크라이나인 아내 미나(30세)와의 사이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가장이다. 그는 부정기적으로 비디오 촬영을 하고 태권도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그의 어려운 생활을 보는 것처럼 태권도 수련생들의 수련여건도 어려워보였다.

 

  
▲ 5번학교의 태권도 수련생들 열악한 조건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수련생들도 사범도 모두 장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 김형효
5번학교의 태권도 수련생들

그들이 태권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도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체육 관련 그 어떤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태권도장이다. 그 흔한 매트도 없는 나무로 된 교실 바닥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태권도 수련생들의 태도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평소 20여 명이 배우고 있으나 지금은 방학기간이라서 7~8명이 나올 거라고 했다. 게나김의 말대로 7~8명의 수련생이 나왔다. 열심히 수련중인 학생들을 보면서 게나김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조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가르치며 자긍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데는 고려인 협회장인 게르만장의 도움도 있다고 한다.

 

  
▲ 태권도장을 찾은 게르만장 태권도장을 찾은 게르만장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수련생들 모습이 인상적이다. 엉거주춤 인사법이 좀 독특한 느낌이다.
ⓒ 김형효
태권도장을 찾은 게르만장

그들은 둘 다 5번 학교에서 어린 시절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자신의 모교에서 한국의 태권도를 가르치고 후원하는 선·후배가 되어있다. 잠시 후 그 자리에 게르만장이 찾아왔다. 순간 게나김은 차렷! 경례!하고 말했다. 모든 수련생들이 게르만장에게 존경심을 담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학생이 더 많았다. 그들은 우리말로 서툰 하나, 둘, 셋 구호를 한다. 그들이 태권도를 배우는 태도를 보면 우리의 얼이 스미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서툰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열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광경을 보면서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열악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3단 정도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게나김에게도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하는 말로 모양이 안서는 느낌 때문이다. 1단으로 사범을 한다는 것이 왠지 씁쓸한 느낌을 주었다. 게나김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체육관에서 수련중인 게나김과 인사를 나눈 후 아쉬운 마음을 안고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