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11) 박류드밀라 고려인 협회장
필자의 봉사단 활동 첫 임지였던 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에 살고 있는 고려인 부부를 만났다. 사실 종교를 틀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임지로 배정받고 나서 당시 대학교수인 나탈리아가 고려인 협회장을 만날 것이냐는 제안을 해왔을 때 거절했다.
다른 대부분의 지역처럼 기독교인들 모임인가 싶어서다. 사실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한국교회에 선교활동의 손길이 뻗쳐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일지는 잘 모르지만,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나 민족문화를 전면에 세운 활동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경험도 있다. 필자가 활동하는 예빠토리야에 한글학교를 개교하고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타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분이 연락을 취해왔다. 그리고 필자에게 살 집을 구하는 일을 도와달라는 청을 해왔다. 그런데 그 청을 하고도 연락이 없어 필자가 연락을 취했더니 이미 와서 살고 있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더욱 이해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 벌어졌다. 필자가 개교한 한글학교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어른들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교사의 통역 일을 하는 고려인에게 배운다며 선교사가 머무는 아파트에서 한글학교를 열고 있었다. 필자에게 배우던 어른들이 그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종교 아니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인간의 인사가 무시되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민족적인 입장에서 경우에 따라 의미 있는 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지는 모르나 그 역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고려인 목사님 부부를 만나면서 필자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종교 문제라는 것이 그동안 여러 사람의 종교인들을 만나면서 고착된 것이라 믿고 또 믿어온 신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빗나가게 해주신 남다니엘(1943년~현재)목사님께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목사님은 2007년까지 6년 동안 고려인 협회장 일을 맡아오셨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부인이신 박류드밀라(1942년~현재) 여사께서 3년째 니꼴라예프 고려인 협회장을 맡아 일하고 계신다.
두 분의 활동은 세세히 알 길은 없다. 단지 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필자가 받은 느낌으로 이해할 뿐이다. 필자는 니꼴라예프의 동물원에서 처음 고려인들을 만났었다. 어린 학생들과 아이들이었다. 그때의 반가움을 기억한다. 이제 1년이 지났고 공식적인 협회장님 부부의 인터뷰를 위해 니꼴라예프를 찾아서 고려인들의 삶에 대해 들었다.
니꼴라예프도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온 대부분의 고려인 이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사모님은 한 살 연하의 남다니엘 목사님을 향한 끝없는 구애를 보여주시면서 애교도 많았다. 나이든 아름다움을 보고 기분이 맑다. 청초한 늙음을 보는 느낌이 신선하다. 우리 목사님은 내가 많이 웃겨줘서 늙을 시간이 없다고 한 번 더 옴짝을 못하게 하신다.
남다니엘 목사님의 어머니 김마리아(1912년~20006년)님과 아버지 고 남다비드(1909년~2004년). 선생은 타슈켄트에서 이주해오셨다고 한다. 당시 국영농장에서 부회장으로 생활기반은 확실했으나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1976년에 니꼴라예프로 이주해오셨다 한다.
그들은 타슈켄트의 농가에서 소문을 듣고 우크라이나로 왔으며 다른 고려인들도 대부분 그렇다고 했다. 지금 그들은 농사일이 버겁지만 먹고 살만은 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이제 농사일에서 멀리하는 자식들을 보며 지내는 한국의 늙어가는 농촌과 같은 느낌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농사일을 하려고 하지 않아 고려인들의 고민이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그렇듯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필자는 남다니엘 목사 교회의 고려인 신도인 박녤라(64)라는 분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가 아들 세르게이를 만났다. 그 또한 한국은 가고 싶은 나라임을 숨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고려인이다.
그렇게 그들 속에 한국은 가고 싶은 나라지만, 알고 있는 지식은 너무 빈약하다. 현 고려인 협회장이신 박류드밀라 여사는 매우 적극적이며 상쾌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농담도 진담도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주신다. 그녀의 모든 말에는 항상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그녀는 재주가 뛰어난 만담가와 같았다.
그녀는 한국에서 왔다고 반겨주시며 국수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시는 동안에도 항상 만면에 밝은 웃음을 선사하시는 재주를 부리신다. 그녀 앞에서 즐거운 폭소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그녀의 그런 재주가 어려서도 소문이 나서 한 동안 곡예단을 따라 멋진 곡예를 하며 보낸 때가 있었다 한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웃음을 놓치지 않게 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람의 입은 지키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배웠다. 부모님께서는 지키지 못할 거면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 대사관에서 몇 차례에 걸쳐 니꼴라예프 고려인 문화센타를 갖추어주겠다며 자리를 물색하라고 한 일이 오래전 일이라 한다. 아마도 정권 교체 이전부터 계속 되어오던 대사관의 노력인 듯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몇 차례 말이 바뀌고 처음 말한 것과 다르게 규모를 줄여서 알아보라고 한다는 말씀이다.
이제는 부담을 반반하자고 한다는 말씀도 하신다. 그 끝에 자꾸 이렇게 가면 자신들의 농지를 임대를 주고 그 임대료를 가지고 만들까 싶다는 말씀을 하신다. 웃으며 내던지는 역성이다. 그 말씀 끝말이 아리다. "내 것이면 사달라고 안한다" 고려인 협회의 것이란 이야기다. 개인의 것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인 협회장으로서 뼈 있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들린다.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가 또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과거 그냥 멋모르고 있었던 3개월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도 든다. 니꼴라예프도 필자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예빠토리야처럼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머무르던 시기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박류드밀라 협회장은 그 소수민족과 자신들의 처지를 비교하기 시작하셨다.
"독일에서는 어린 아이들 견학을 시켜주었다. 조국에서 돈 다 내고 고국방문을 하게하고 선물도 줘서 보냈다더라!", 폴란드도, 그리스도, 불가리아, 아르메니아, 유대, 아제르바이잔 민족들도 다 민족문화회관이 있다. 그런데 고려인만 없다고 한다. 사실 필자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들 문화관을 함께 들러보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의 문화관을 열며 견학을 시켜주었을 때 박류드밀라 협회장께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때 피아노연주가 수준급이라는 권미하일을 소개하신다. 그는 정말 보기 드물게 우리 말 이름을 갖고 있었다. 25세에 한글이름을 갖고 있는 그의 이름은 권명철(25)이다. 정말 반가웠다. 얼마전 소개한 수도 키예프의 외국어대 한국어학과 학과장이시며 고려인 협회장이신 강정식 교수님의 자제분들도 한글 이름이 없던 것과 너무나 비교가 되는 기쁜 순간이다. 아니 사실 기쁨보다 반가움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아무튼 그는 러시아에서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못하고 있다니 안타깝다. 그가 다른 말은 못해도 자신의 이름 석자를 권명철이라며 소개하는 모습은 더없이 당당해 보였다.
필자는 끝으로 박류드밀라 협회장님에게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입버릇처럼 물었다. 그녀 역시 숨김없이 직설적이며 부드럽게 말씀을 이어갔다. "언어, 문화, 역사를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젊은 아이들이 그런 이해 속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안과 밖이 하나였으면 좋겠다. 말이 앞서고 실천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렇게 배워주지 않았다"는 말로 그것은 아쉬움에 대해 토로하는 듯한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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