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사는 세상/내가 만난 세상 이야기

농산물 상납하라는 우크라이나 경찰들

by 김형효 2010. 9. 14.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15)-자빠로쟈 고려인과의 만남(4)

 
  
▲ 알렉산드라 신(율랴티모센코 지역연합 자빠로쟈 지역당대표, 54세) 알렉산드라 신(율랴티모센코 지역연합 자빠로쟈 지역당대표, 54세)씨는 현재 우크라이나 살고 있는 고려인 정치인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의 인터뷰 중 찍은 사진.
ⓒ 김형효
알렉산드라 신(율랴티모센코 지역연합 자빠로쟈

알렉산드라 신(49세)과 짧은 만남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가 지내온 이야기를 후일 이메일로 주고받기로 했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가족이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단 둘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수많은 고려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아직도 계속될 이야기가 있지만 말이다.

 

나는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고려인으로 보기 드문 정치인이기에 우크라이나 고려인의 미래에 대한 것들을 질문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의 이주사와 삶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고 물었으나 "무엇을 알고자 하느냐"는 그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지극히 의례적인 말로 답을 하고 쫓기듯 급히 작별인사를 했다.

 

  
▲ 황당한 민족차별? 고려인농부가 재배한 농산물 저영향평가 우크라이나 자빠로쟈 지역의 한 신문에서 고려인 농부가 재배한 각종 농산물의 영향가가 떨어진다는 문제의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율랴티모센코 전총리가 속한 지역연합당의 알렉산드라 신씨의 사무실에 비치된 신문에 소개된 고려인 농부관련 기사다.
ⓒ 김형효
황당한 민족차별?
  
▲ 고려인 농부 텐끄림(62세)씨 고려인 농부 텐끄림(62세)씨가 텐베체슬라브 씨와 대화중 시선을 멀리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꽉다문 입술에 그의 고된 세월이 보이는 듯하다.
ⓒ 김형효
고려인 농부 텐끄림(62세)씨

다소 무거운 마음이 되었다. 홀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식도 없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처지는 필자와 같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49살, 사실 아이를 낳기 힘든 나이다. 그런데 그의 대에서 단절되는 역사! 그냥 그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언젠가 필자에게 결혼을 재촉하시며 나이든 청년에게 "우주의 질서를 지키라!"던 시인 김준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 혼자인 필자에게 짓눌린 아픈 마음이다.

 

대단한 의미의 자손의 대를 잇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의 삶에서 의미 있는 가치인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결핍으로 가득한 혼자인 필자의 삶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아이는 몇이냐?"고 질문했다가 "없다"는 답을 듣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시 그의 사무실을 나서서 텐베체슬라브씨의 안내를 따라 고려인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을 향했다.

 

  
▲ 이름을 묻지 못한 고려인 농부 멋지다. 시름이 가득한 얼굴빛에 사색도 깊어보인다. 그의 이름을 묻지 못했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술잔도 기울였다.
ⓒ 김형효
이름을 묻지 못한 고려인 농부
  
▲ 움막 옆에 쌓아둔 오이 더미 농로 옆 숲에 움막을 짓고 사는 고려인 농부들이 수확한 오이다. 움막 옆에 쌓아둔 오이더미!
ⓒ 김형효
움막 옆에 쌓아둔 오이더미

그곳에는 많은 고려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고려인 텐바실리(54세)씨는 2000여 평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1995년에 이주해 왔다고 한다. 아들, 딸은 여전히 우즈베키스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도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인근에서 텐끄림(62세)씨도 딸과 함께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2000여 평 농사를 짓고 있었다.

 

몇 걸음 옮겨 농로를 따라 들어가자 다시 또 다른 고려인이 숲에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사는 분 중에 64세의 이게나씨도 있었다. 그는 사할린 우수리스크에서 이주해 왔다고 했다. 딸 셋을 둔 그는 자식도 아내도 농사일에는 손도 대지 않게 한다고 했다. 혼자 억척스럽게 우크라이나인 농부들과 농사를 짓고 있었다.  

 

  
▲ 아르메니아인 마도얀 가야니야(32세) 고려인 농부를 도와 일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마도얀 가야니야(32세)씨다. 그녀는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밝은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 김형효
아르메니아인 마도얀 가야니야(32세)
  
▲ 수확한 작물을 가려 썰어 말리고 있다. 수확한 작물 중 부실한 상품을 가려 썰어 말리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 한국인지 우크라이나인지 알 수 없게 한다.
ⓒ 김형효
수확한 작물을 가려 썰어 말리고 있다.
그곳에는 아르메니아인 마도얀 가야니야(32세)라는 젊은 여성이 고려인 텐끄림씨를 돕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농로 옆 숲에 집이나 다름없이 규모있는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수확한 작물을 보관·판매할 수 있도록 천막을 쳐 놓았다. 우크라이나인 농부들을 위한 움막도 함께 있었는데, 인근에 집이 있는 고려인들은 우크라이나인 농부들에게 움막을 맡기고 출퇴근하는 형태의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중에는 자빠로쟈에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걸린다는 드네쁘르뻬체롭스키(днепрыпечеровский)에서 온 사람,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러시아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여름 한 철 이곳의 농토를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는 다시 다음 해에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장기거주를 하는데 현지 경찰들은 그것을 미끼로 돈을 뜯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필자가 머무는 동안에도 돈 대신 농산물을 상납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눈엣가시같은 일을 목격하고도 안타까운 마음만 달래야했다.  

 

 

 

  
▲ 김이스크라(58세)씨와 그녀의 동생 김게나(49세)씨 들판에서 만난 김이스크라(58세)씨와 그녀의 동생 김게나(49세)씨다. 김이스크라씨가 반갑게 필자를 맞아주고 있다.
ⓒ 김형효
김이스크라(58세)씨와 그녀의 동생 김게나(4
  
▲ 농부 이게나(64세)씨다. 홀로 힘겨운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이게나 씨다. 그는 우크라이나인 부인과의 사이에 3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병환을 앓고 있지만 혼자 병간호하며 농사일도 홀로 하고 있다고 했다.
ⓒ 김형효
농부 이게나(64세)씨다.

나는 그곳에서 김이스크라(58세)씨를 만났다. 그녀는 내가 만난 우크라이나 고려인 중 키예프 외국어대 강정식 교수 다음으로 우리 말을 잘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몇 해 전 한국에서 2년여 살다 왔다고 했다. 강남의 한 식당에서 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일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곳에는 그녀의 남동생인 김게나(49세)씨도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크림인근 지역의 헤르손, 장꼬이, 끄라스노페레꼽스크의 고려인들처럼 대규모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심과의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농산물을 생산하여 직거래를 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두 번째 자빠로쟈 방문길에 곧 김이스크라 씨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기거하기로 했다. 4박 5일 일정이었다.

 

  
▲ 김이스크라 씨와 어머니, 김타티아나(82세) 할머니 김이스크라 씨와 어머니, 김타티아나(82세) 할머니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필자에게 자신의 지나온 역사를 들려주려고 했다. 아버지는 강원도 압다치에서 이주해왔다고 한다.
ⓒ 김형효
김이스크라 씨와 어머니, 김타티아나(82세)
  
▲ 타티아나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타티아나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이다. 직접 담근 된장국을 끓여 멀리서 온 필자에게 밥상을 차려주셨다. 진한 된장 맛에 깊은 슬픔도 절여진 느낌이었다.
ⓒ 김형효
타티아나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그녀는 필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겪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또한 이곳의 고려인들에 삶에 관심을 가져주는 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와 그녀는 많은 부분 다른 이해로 말싸움에 가까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고려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는 필자의 욕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