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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125년 외세 지배에도 독립의 꿈 포기하지 않은 나라

by 김형효 2010. 12. 3.

 [처음으로 떠난 12일간의 유럽여행 4] 폴란드 끄라코프에서 오시비엥침 ①

 
  
▲ 마마호스텔 안내지 역에서 걸어와 중앙시장 광장을 가로질러 Bracka4 번지에 위치해 있는 마마호스텔은 저렴한 여행자에게는 동반자가 되어줄만큼 편안한 휴식처였다.
ⓒ 김형효
마마호스텔 안내지

 

 

끄라코프에 도착하고 유스호스텔인 마마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대학생들의 배낭여행과 같이 저렴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와 기차로 국경을 넘고 한국 돈으로 2만 원 이내의 숙소를 잡는다. 그렇게 숙소를 잡고 1~2박을 한 후 숙소 근교를 중심으로 도보 여행을 하며 여행지의 분위기를 탐색한다.

 

늦은 오후에 도착한 마마하우스는 세계인들이 끄라코프를 찾을 때 많이 이용하는 유스호스텔 중의 하나였다. 특히 필자처럼 저렴한 여행객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으로 저렴한 숙박비에 아침 식사 포함이다. 가는 날이 장날(?)로 즐거운 이벤트가 준비되었다. 유스호스텔에서 투숙객을 위해 준비한 와인파티였다. 금방이라도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틀을 머물기로 하여 마음이 한결 가볍다.

 

  
▲ 성 마리아 교회 끄라코프 중앙시장 곁에 자리잡은 성마리아 교회의 첨탑이 장엄하다. 끄라코프 사람들의 영혼과 함께 성령도 깨어나고 있을까?
ⓒ 김형효
성 마리아 교회

 

 

  
▲ 동그란 빵 하나 1즈워티 구멍 뚫린 도너츠 모양의 마른 빵 하나면 여행객의 바쁜 걸음에 한 끼 식사도 가능할 것만 같다. 소금끼가 많아 짠 느낌이었다. 딱딱한 맛도 여행객의 고독의 동반자처럼 느껴졌다. 빵 하나에 우리돈 400원 정도......,
ⓒ 김형효
동그란 빵 하나 1즈워티

 

 

마음 같아서는 유스호스텔에 머문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와인을 마시고 싶지만, 짧은 눈인사, 손인사가 전부다. 가끔 몇 마디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 유스호스텔에서 제공한 맛있는 폴란드 와인을 마신 후 도보로 근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해가 저문 끄라코프의 야경이 볼만한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에 기대가 크다. 사실 텔레비전 화면에서나 보던 이국의 특색 있는 건축물에 빛나는 조명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오늘은 바벨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폴란드 역사의 중심은 바르샤바가 아니라 끄라코프다. 1596년 끄라코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가 이전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18세기까지 왕의 즉위식을 끄라코프에서 거행할 정도로 끄라코프는 폴란드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곳이다.

 

폴란드 발전의 3요소는 교육, 종교, 민주주의

 

 

 

  
▲ 바벨성에서 본 바벨성의 교회 바벨성에는 역대 폴란드 왕들과 얼마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부부가 잠들어있다. 어쩌면 바벨성은 폴란드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 김형효
바벨성에서 본 바벨성의 교회

 

 

  
▲ 바벨성에서 본 끄라코프 시내 바벨성은 끄라코프 시내 전경을 보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었다. 사방으로 바벨성을 둘러본 다음에는 끄라코프를 다 보았다 할 수 있을 법하다.
ⓒ 김형효
바벨성에서 본 끄라코프 시내

 

 

2차 세계대전 후로도 폴란드의 역사와 유럽사회, 세계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되는 곳이 끄라코프와 인근 오슈비엥침(Oshwiecim)이다. 오시비엥침은 아우슈비츠(Auschwitz)로 더 알려져 있다. 나치즘에 반기를 든 독일인은 물론 많은 유럽인들 그리고 러시아인, 유태인 등이 집단 학살당한 곳이 아닌가?

 

끄라코프는 세계인으로부터 존경받던 종교지도자 요한 바오로 2세가 공부한 야길론스키 대학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125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 조국 독립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왔다.

 

나치가 유럽을 지배할 때도 그랬고, 소련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었을 때도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소련에 대항하였다. 폴란드는 구 소련의 붕괴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자유화 이후 실시된 시장경제 도입, 국영기업의 민영화, 화폐개혁 등을 통해 발전해왔다.

 

  
▲ 바벨성에서 본 비수와강 바벨성에서 본 비수와강, 역대 폴란드 왕들의 집인 바벨성에서 비수와 강의 저물녘! 굽이굽이 흘러온 폴란드 역사가 아직도 도도한 흐름 속에 있다는 속삭임을 보는 듯했다.
ⓒ 김형효
바벨성에서 본 비수와강

 

 

폴란드 발전에는 오래된 교육적 전통이 큰 역할을 해왔다. 교육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내고 있다. 또한 종교가 도덕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다. 현대 사회 종교적 모순이 극심한 한국 사회가 유심히 살펴볼 부분이란 생각이다.

 

특히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서의 종교의 역할은 특별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세계인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2세(Karol Wojtyla)도 폴란드인이다. 폴란드의 교회가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나 동요를 억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평화의 상징이 되지 못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부러운 일이다. 폴란드의 민주적 전통과 종교적 공동선은 도덕적 억제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민족과 사회 분열에 동인이 되는 일부 한국의 종교인들이 귀감을 삼아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1795년 폴란드가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완전 분할되어 유럽에서 사라질 때까지 폴란드는 민주공화국이었다. 왕위조차 세습이 아닌 선거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폴란드 국민에게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오시비엥침 역에 도착한 열차 끄라코프에서 오시비엥침 역에 도착한 열차다. 끄라코프에서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거리다. 버스는 곧장 오시비엥침 박ㅁㄹ관으로 향하고 기차에서 내리면 20여분 걸어야한다.
ⓒ 김형효
오시비엥침 역에 도착한 열차

 

 

하지만 그들이 흘린 역사적 아픔의 눈물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모르는 이가 없지 않은가? 사색이 깊은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9시 끄라코프 역으로 향했다. 악명 높은 곳, 인류의 재앙과도 같은 유물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찾기 위해서다.

 

가는 길에 포즈난이란 곳에서 사는 한국인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오시비엥침을 가기 위해 빠른 걸음을 옮겨 딛고 있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따 보자며 '안녕'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