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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내가 만난 사람들

화룡현에서 만난 중국 동포 시인 故 김문회 선생님~!

by 김형효 2009. 11. 1.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만났던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 보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뵙던 그때는 

사는 것으로 치면 제게는 정말 연속적으로 가혹한 선택을 멈추지 않던 날들입니다.

그러나 사는 의미로 치면 그 어떤 때보다 활기있고 보람을 느끼던 날이었습니다.

세상의 바른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다짐으로

출판업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민족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게 위해

나름 의미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입니다.

그런 일의 연장선으로 중국동포 문인들과의 만남도 활발히 해나갔습니다.

 

2001년이었던가 싶습니다.

선생님에 제자이며 제게 연변 문학가들을 알게 한 주인공이 석화 시인입니다.

 

지금은 연변대 교수가 되셨지요.

사실 선생님 댁을 찾은 것도 석화 형님의 소개였지요.

 

 

 

사진 왼쪽은 2001년 선생님과 작별하며 청산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은 2007년 조선족 시인협회 창립식에 참석했다가 연길역에서 시인 석화 연변대 교수와 필자

 

동포 사회의 명망 있는 시인인 조룡남 선생님의 집에서 객으로 머물다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서툰 중국어 솜씨로

홀로 선생님을 찾아가는 일은 어찌보면 모험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꼭 가보고 싶은 화룡이었습니다.

민족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어린 시절의 동화 청산리가 있는 곳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날의 위인전을 읽는 것은 역사적인 동화책을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구릉과 산 그리고 논밭이 즐비한 한국의 산천과 너무나 흡사한

화룡길을 저는 연길 역 앞에서 표를 끊고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전화연락을 드렸었고

선생님은 제가 타고 가는 버스를 터미널에서 기다려주셨지요. 

 

버스 창가의 풍경을 이삭을 줍던 마음으로

촉수를 곤두세우고 기억하려 애쓰며 보고 보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지난 역사의 실루엣을 따라 즐거운 사색을 하기도 했고

조국과 민족이라는 큰 명제 앞에서 주억거리며 의미심장한 다짐도 했습니다.

 

천년이 간 것도 아니고 십년이 간 것도 아닌

제 발걸음은 곧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화룡버스정류장에서 선생님을 뵈면서 멈추었습니다.

 

선생님은 멋적은 모습으로 소박한 차림으로 절 따뜻하게 맞아주셨지요.

지금도 그때의 만남은 가족의 상봉도 아닌 대규모 민족의 상봉처럼 느낍니다.

저만이 갖는 독특한 감성의 영역이니 이 표현이 적합하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독특한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곧게 길게 자란 옥수수대를 엮어 만든 울타리 집들이 즐비한 집들 사이를 지나

인사의 말들을 주고 받으며 선생님의 어여뿐 소녀처럼 보이시던 사모님을 뵈러 갔지요.

 

가던 길에 작은 병원 2층에 병원 간호사가

비내리던 창밖에 등을 기대듯 창가 귀퉁이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속 풍경처럼 오래도록 기억되었습니다. 

 

선생님 댁은 바로 문을 열자 부엌이었고, 그 부엌과 맞닿은 방이 있었습니다. 

단칸방의 살림에도 선생님과 사모님은 지극히 절 맞아주셨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라면 그렇게 맞아줄 사람도 없을 것이며

아마도 사전에 오는 것조차 허락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시인 동생~!

그것도 그 제자는 지금 한국에서 머물고 있고 홀로 찾아온 낯선 이방인인 저를 말입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선생님 저는 부엌의 가마솥에 정성을 깃들인 사모님의 밥상을 받았습니다.

사모님은 제 눈에 겉모습은 연세가 있으셨지만, 마음과 움직임은 17세 소녀였습니다.

아름답구나! 정말 아름답다. 지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우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연변의 여성 시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제 어린시절의 고향같은 정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그보다도 더 먼 먼 과거 우리네 민족의 어머니 같은 깊은 정이 느껴졌습니다.

그날밤 저는 거침없는 제 이야기를 하고 민족의 이야기를 했지요.

더구나 선생님께서 권하는 사내가 첫 인사로 술 몇잔도 못하면 되겠느냐는 느긋한 말씀에

멍해진 채로 선녀같은 사모님 앞에서 거푸 마셨지요.

 

알콜 도수가 38도에서 45도를 넘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 소주 한 잔 마시고도 취하는 술바보였으니까요.

그 고통을 선생님도 보셨지요.

사모님도 그렇고요.

 

마시다 방 뒷문을 열고
작은 채마밭에 목울대를 크게 벌려 실례를 하고

그러면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등을 두드려주셨고

그 곁에 수돗가에서 다시 청결세수를 했지요.

그리고 다시 들어가 술을 권하는 선생님 잔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러다 잠이 들고 깨어보면 선생님은 사모님과 앉아서 도란거리고 계셨고

아마도 서너 차례 반복되다 아침이 밝은 듯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겪은 고통의 술잔들의 아픔만큼들이 그리운 꿈같은 시간입니다.

몇번이고 보고 싶고 가고 싶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리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고인이 되셨다는 말씀을 저는 그냥 석화 시인의 카페를 통해 보았답니다.

사실 회한이 서리는 마음으로 석화 형님에게는 묻지도 못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오늘에야 그리움을 담고 선생님께 뒤늦은 묵념의 예를 올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원망없이 은자처럼 사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석화 형님의 이야기도 조룡남 선생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10년 같은 밤을 지낸 것처럼 그런 기억으로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셨던 러시아 동포들의 아픔에 대한 글들을 아프게 읽었습니다.

그 아픔이 선생님에 아픔이기도 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픔들이 사해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아픔인 것도 더욱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모자라지만 조금씩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나누는 데 힘을 쓰면 살고자 합니다.

보는 눈으로 보이는 눈으로 보이는 것 보는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도록 하겠습니다.

 

이참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소녀, 선녀님에 안부를 묻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일상을

다시 철원의 북녘 고향 17세 소녀적을 떠올리며 지내고 계실까요?

 

          봄날의 약속

 

중국동포 故김문회 시인

 

이 봄

우리 다 같이

손에 손잡고

애 어린 새싹으로 피어납시다.

 

겨울이 달가당 풀리는

저 냇가에

눈을 뜨는 버들가지로

엉뚱스레 돋는 한 떨기 파란 잔디로

환호하며 일어섭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명절처럼 분주한

이 봄 날 아침

조용한 약속을

마음 밭에 파종합시다.

 

머언 하늘에

쟁쟁한 명상에서

우리 서로의 얼굴을 더듬어내고

대지를 누르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태산 같은 자세를 읽혀가면서

 

그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세상은 괜히 넓기만해서

저만큼 일어서기도 힘겨운 계절

 

부드럽게 불어오는

한 올에 바람도 나누어 가질

아량과 너그러움을 안고

 

저 못된 매바람에 방자와

내굽날리는 개천에 어리광도

뜨겁게 푹 받아드리는

자연의 조화를 배워둡시다.

 

이봄 당신과 나

우리 다같이

또 한 번 새싹으로

이쁘게 태어납시다.

 

냉혹한 여름도 함께 헤치고

풍요 설레는 저 황금의 언덕

우리 가까이 다가설 그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