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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네팔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머니라이씨

by 김형효 2011. 10. 10.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37)

 

이방의 한 시인이자 한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 곧 발걸음을 학교로 옮겼다. 일행이 함께 다른 나라 아이들을 보기위해 학교를 찾은 것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도 네팔 학생들의 깊고 맑은 눈망울을 보면 그냥 멀어지지 못하고 다가간다. 그러니 학교 현장에 몸담은 교육자로서 그 감회가 더 할 것이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는 마음도 즐겁다. 아이들도 그런 우리에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반겨준다.

비좁은 학교 운동장이지만,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꿈도 작을 수는 없다는 진실을 보는 기분이다.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밝은 모습에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리라.


우리는 곧 천드라 쉬레스타의 집에 갔다. 이미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런 꾸밈새 없는 모습으로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차분하고 여유가 넘치는 인격의 소유자다. 곧 그의 가족들이 일행에게 인사를 전하러 왔다. 인사를 나눈 후 곧 먹을거리를 준비해주었다.

로한이라는 아들에게 밥을 떠넣는 머니라이에 모습은 우리네 한국인들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의 그림 이야기와 한국에 다녀온 천드라의 한국에 대한 인상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권했지만 일행의 일정이 바빠서 간단하게 찌아를 달라고 했다. 최근에 네팔 사람들은 우리가 커피에 비스켓을 권하듯, 아니 과일과 커피를 내놓듯 비스켓에 찌아를 내놓는 집이 많다. 기념 사진을 찍고 천드라의 그림을 감상하고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룸비니 길을 재촉했다.

오후 비행기라서 출발 전에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짐을 정리해둔 기자의 집에 들러서 곧 머니라이(38세)집을 찾았다. 그는 솔로쿰부(에베레스트 산 아래 사람들)에서 태어났다. 같은 솔로쿰부에서 태어난 미모의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그도 역시 한국에서 일하여 돈을 벌어온 이주노동자 출신이다. 형님과 힘을 합쳐 함께 집을 지었다. 같은 집의 위 아래층에서 사는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머니라이 가족들이다 .형님의 딸과 그의 부인, 여동생이 함께 어울렸다.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간직한 그도 다시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돈에 대한 것만이 아닌 한국인과의 소통, 그리고 인연들이라는 것이 고맙다. 기자는 그가 한국에 있을 때 서울의 한 레스토랑에서 얼굴만 알던 사이였다. 이번 여행에서 이주노동자였던 라이족 친구들을 만나는 날 인사를 하였고 그가 한국어 강의를 주선했다. 그의 도움으로 5개 학원에 8개반의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집에서 머문 날도 많았다. 가족처럼 대해주는 그와 그의 아내가 참 고마울 뿐이다.

요즘 네팔은 카트만두로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네처럼 부동산 소개업소가 활성화 되어있지 않아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 로한(2세, 임금이란 뜻)은 기자를 보면 좋아라하고 잘 따른다. 그래서 그가 날 맞아주는 것같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손님) 신세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