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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룸비니 동산을 걷고 사색하다

by 김형효 2011. 10. 10.

 

상그릴라(SHANG RI-LA)의 땅, 네팔에서(40)

 

아침이 밝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경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하루, 모든 새로움을 향해 길을 내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상의 새로운 탄생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소중한 날들을 허비하기 바쁘다. 그것을 삶이라 여긴다.

신비로운 인생의 나날을 일상이라는 포악한 사슬에 묶인 채 말이다. 그 뿐 아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 일상에서 구원하고자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그 사슬에 견고함에 놀란 인간은 오히려 화를 내거나 일상을 무기로 싸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도 무가치하게 인생을 탕진하는 것이다. 기자는 그 어떤 성인의 삶도 일상을 속박 속에서 보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흘러가는 강물 혹은 빗물처럼 흘러 보내는 그 일상을 내밀하게 한 페이지의 책장을 넘기듯 살아내지 못한다면 너무나 아쉽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전체의 페이지를 놓고 본다면 아쉬움에 그치겠는가? 한탄을 몇 곱절로 더할 일이 아닌가? 밝아오는 룸비니 동산의 아침 조금은 이른 새벽 밤, 혹은 이른 아침에 일상을 위해 내 몸을 세상에 내어놓는 시간의 사색이다. 무념도 무상도 잊고 깊은 사색이 나를 이끌고 있다. 어쩌면 무념무상을 말한 석가모니께서는 무념무상 속에 깊은 사색이야말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살아있는 동안의 고행이라 한 것은 아닐까?

독일인들이 세운 독일 사찰이다. 낯설은 나라의 사원이지만, 작고 아담하게 잘꾸며졌다.
대성석가사다. 황룡사를 모델로 시공했다고 한다. 아직 마무리가 덜 된 사찰이 안타깝게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이다.

어느 날처럼 잠에서 깨고 햇살처럼 나의 얼굴을 비추기 위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선다. 한 걸음 오늘의 일상이 나의 인생이다. 인생을 채비하기 위해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챙겨들고 밥을 먹는다. 어제의 밥도 오늘의 밥도 내 인생을 뒷받침한다.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밥을 위해 일상을 보내고 그 일상을 일생을 다하여 수행한다. 그러나 때로 일생을 다하여 충실하다고 했던 일상 때문에 사람은 피골이 상접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게 된다. 제발, 제발 천천히 아름다운 삶의 동산을 룸비니 동산의 연꽃같이 밝힐 인간의 길을 열어갈 수는 없을까?

훗날의 후회가 눈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안하무인으로 일상을 무기로 도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일상이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을 꾸려가는 하나의 도구와 같은 일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 나의 항변이나 나의 이런 말의 자유는 미필적 고의의 도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상을 무기로 사는 사람들이 기자를 바라보는 모자람이 너무 많아서다. 변변한 직업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변변한 직업이 없다는 것은 경제적 능력과 결부된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밥상을 제대로(제대로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너무나 개인적이다.)꾸려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보는 사람들의 눈으로 얼마나 한심한 인생인가? 물론 내 자신이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꽃이 빛을 발하고 있다. 밝은 빛에 사색을 불러오는 느낌이다.
인도인인지 네팔인인지 모를 사람들이 사리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길을 걷고 있다. 부처님 탄신지를 둘러보고 오는 이들이다.

석가모니 탄신지 룸비니 동산을 걷는 발걸음은 상쾌 유쾌 발랄한 청춘의 동산을 걷는 느낌이다. 저기 성자처럼 걷는 인도, 혹은 네팔 남부의 사람들이 걸어온다. 발가락이 다 드러난 슬리퍼를 신고 유유자적한 모습은 깨어있는 자, 눈 뜬 자의 모습이다.

사리를 걸친 여성들도 아이와 함께 걷고 있다. 성자가 내게로 오고 있다. 나도 그들처럼 걸을 수 있을까? 그 때가 언제라도 한 번쯤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의 대열에 서 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