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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랑탕 히말라야 6박 7일의 기록

랑탕(rangtang) 히말라야를 가다.(5)

by 김형효 2008. 2. 22.

 

 

 

 

- 고산지대 사람들의 생활상 파괴인가? 변화인가?


고다다벨라를 지났다. 타망족이 운영하는 산장의 아이들의 얼굴은 검게 타있었다.

계곡의 찬바람과 자외선 노출이 심한 산악지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이 검게 타있다.

그러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도중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선크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대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들 낯선 이방인들만 걱정스런 피부라는 생각도 하고 안타깝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시혜적인 시선이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그들의 생존의 기반을 흔들어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네팔에서 많은 어린이들로부터 사탕을 달라는 아이들이나 돈을 달라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혜적으로 주는 것들로 인해 그들에게 좋지 못한 관성이 생기게 된다. 조금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런 행위들이 그들의 생존 기반을 보장해주는 일이 아니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네팔 정부에서도 외국 관광객들에게 그런 구걸행위에 응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멀쩡히 학교에 다니며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이들조차 그런 구걸행위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철저하게 공식화한 기부행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기부를 할 만한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지는 않다.

연구하고 노력해가며 작은 정성을 더하는 일은 관광객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고다다벨라에서 휴식을 취하며 만나는 아이들과 아이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들을 보면

옷 입는 맵시가 다를 뿐 여지없는 우리네 옛사람들이 환생한 모습이다.

거친 피부와 검게 탄 얼굴을 제외하면 우리 모습 그대로다.

마침 어린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한국 관광객이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와 그의 어머니다.

네팔에서는 엄마(EUMMA)를 아마(AMA)라고 부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다시 들어도 내게는 엄마로 들린다는 것이다.

가이드 단두에게 물었다. 지금 엄마라고 한 것 아니냐!

나는 여지없이 엄마로 듣는데 단두는아마로 듣는다.

네팔사람들은 (A)를 (어)로 발음한다. 그렇다면 (엄아)인가? 혼자 오랫동안 그 울림을 반복해서 생각하며 걸었다.

길을 가고 오며 만나는 수많은 부조탑들을 보며 그들이 받드는 신에 대한 경배심을 생각한다.

그들의 삶의 일상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종교,

 그런 현장을 접하고 보면 마치 성전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을 입구마다 여지없이 조성되어 있는 돌로 된 부조물에는 수많은 옴마니반메홈이 새겨져 있고, 수많은 옴의 질서가 있다.

땅에는 부조물들이 하늘에는 오방천들이 날리고 있다.

깊은 계곡에서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 오방천들이 나부끼면서 옴을 부르짖고 있는 것만 같다.

지상은 신의 제단처럼 산하를 조각한 듯 층층계단 같은 논밭이 조화롭기만 하다.

산장이 있는 곳마다 몇몇 집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돌담을 쌓아 농작물을 재배하거나

그 안에 양이나 가축들이 머물게 해놓았다. 어쩌면 깊은 낭떠러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편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듯도 하다.
         
작은 상점들과 산장이 즐비한 산길이다.

모두가 많은 관광객들을 통해서 현금을 손에 쥐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이기도 하고 생존의 이유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그네는 그것도 못마땅하다. 산중에 질서가 파괴되어 가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다.

좋은 자리가 결정되고 그 자리가 결정되는 데 따라 산중에서 빈부의 격차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자본이 지배해가는 질서가 형성되어 갈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스스로 자연과 동일시되어 왔던 그들이다.

이제 그들의 변화와 함께 히말의 만년설이 급격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그들의 변화에 속도와 함께 하고 있는 느낌이다.

비탈진 낭떠러지 길에 아슬아슬하게 터를 잡고 있는 논밭을 보며 고산지대의 척박한 삶의 단면을 본다.

그러면서 앞서의 안타까움보다 관광객들이 오가며 변화에 적응하는 그들에 삶을 보며 다행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앞을 보아도 낭떠리지요. 뒤를 보아도 낭떠러지요. 앞이나 뒤나 히말라야 만년설의 눈부심인 산중이다.

솔개와 독수리가 창공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지상의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한 비상이다.

아마 저렇게 비상하며 눈길이 맑아지는 것인 모양이다.

랑탕 히말라야의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트래커들이 모여드는 랑탕 마을이 가까워졌다.

멀리 랑시사(선생님의 고개)라는 만년설이 쌓인 또 다른 히말라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랑시사를 넘으면 바로 티벳이다. 랑탕을 넘어도 티벳이지만, 랑시사는 더욱 가까운 길이라 한다.

랑탕 마을 한복판에 오방천과 오방천을 엮어서 세운 깃대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신전(神殿)같은 곳이라고 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머무는 곳이다. 

다시말해 저 랑시사와 랑탕히말라야는 중국이 티벳을 점령해 들어올 때

티벳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피난하여 넘어온 피난길이기도 하다.

그들은 저 랑탕히말라야와 랑시사를 넘는 길은 험한 길이 아니라

가혹하고 처절한 생사여탈권을 쥔 그런 곳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고국을 향해 성전을 만들며 아주 가까운 땅에서 기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