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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사가르마타:하늘바다everest를 걷

사가르마타(하늘바다)를 사색하다.(5)

by 김형효 2008. 9. 10.

익숙한 느낌으로 낯선 길을 간다는 것,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잉태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낯선 길 위에서 지나온 날에 대한 후회와 번민을 더 강하게 붙들고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현실의 벽을 외면하는 방랑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더 절실하게 인정하게 하는 현재형의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듯하다.

<저 아래 비탈진 산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인가? 옛적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오랜 옛날 우리들의 선조님들의 길가는 모습은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싶다.>

나는 내 지나온 날 없이 현재의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그렇듯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미래에 내게 닥칠 현실을

미리 영접하려는 현재적인 몸부림이라고 항변하려한다.

사람들은 내게 참 부러운 놈(?)! 혹은 왜 그러고 다니는가? 의아해 한다.

하지만 난 나름 훌륭한 나의 결정으로 미래를 촛불 밝혀 걷고 있다 자부한다.

그래서 후회없는 무일푼의 자본주의 사회의 충(蟲)으로 존재한다해도 두렵지 않다.

돈주의 사회의 돈벌레보다는 묵묵히 내 길을 인정하며 꿋꿋해지고 싶다.

현재의 사람이 여행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사람들은 이 땅을 벗어나고

이 땅을 배회하는 자를 여행자라 칭하니 나의 설명도 길어질 수 밖에 없느니......,

현재인이면서 이방인이 아닌 사람과 현대인이면서 나그네가 아닌 사람은 몇이 있는가?

나름 근거리라 자위하면서도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탯줄을 자른 곳과는 먼 곳에서 둥지를 틀고 살지 않은가?

그렇게 길 떠난 자가 낯선 길을 두리번거리거나

좀 더 멀리 떠나는 사람만을 국한해서 방랑벽으로 몰아대니 안타까운 나그네가 조금은 서러워진다.

사실 그 서러움이 날 사색하게 하는 음영같은 것이기에 그것은 나를 살리는 기운인데도 말이다.

<루크라 주변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지도>

루크라를 벗어날 때 나뭇 그늘 속에서도 이정표를 선명히 밝히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정말 시골스럽지만, 다정다감한 안내도이다.

어서 오이소! 어서 오시쑈! 반갑소!

그래 그런 느낌의 안내도이다.

삶의 길에도 저렇듯 선명하고 다정다감한 안내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선인들에게서 우리는 영향받는다며 그들의 이야기나 시를 읽고 명언집을 읽는다.

그러나 내게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내게는 그 말과 의미의 미로가 형성된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미로가 생겨 그들의 삶에 각기 다르게 작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처럼 나그네의 길을 밝히지는 못하잖은가?

<책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어깨 메고 바닷가 모래밭을 지나 학교에 가던 어린 날들이 생각난다.

저 산길의 평화와 적요를 안고 걷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지난날을 걷는다>

<1800미터 고지의 비탈진 산길을 걸어 학교에 가면서 배구공을 끼고 가는 여학생,

그 뒤를 따르는 코흘리개 남동생,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과 마을사람들>

그렇게 밝히지 못하는 길을 사람들은 알면서 끝끝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모른다고 말하는 자나 잘 안다고 하는 자나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듯 망연자실해진 모습으로

모자라지만 넉넉한 품을 키우며 꿋꿋하게 자기 삶의 한 몫을 다하면서 현실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 순간도 외면할 수 없이 사람들에게 고개를 수그릴 수 있다.

때로는 빳빳한 가죽 옷깃을 세우듯 댓거리를 하며 맞서던 사람에게도 그리움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인연없이 살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을 날마다 잊을 수 없다.

밤이면 어둠이 나를 칭칭 감고 돈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큰 울음을 운다.

쾌활해진다.

그 울음이 주는 신성한 기운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저 나와 같은 룽바가 길흉화복의 오방천을 거느리고 바람에 날린다. 숨어우는 바람처럼, 그 뒤에 나처럼>

<저 욕(慾)으로 하는 일이 욕(慾)을 벗어난 일이 될 때까지 그들은 길에서 웃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대처럼 산다.>

멀고 먼 히말의 신성을 감추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험준산령들,

그 길을 걷고 그 길의 배후에 나의 배후도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사실 나는 내 진실을 갖고 나를 응대하고 살아가지만,

나는 나의 내면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나의 배후가 여전히 궁금하기만 하다.

어쩌면 저 험준산령의 히말라야 산맥처럼

나의 신성을 지켜내기 위해 나를 더 깊숙히 감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내가 나를 움켜쥔 형국이다.

그러나 난 알 수 없다.

사람은 아는 일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안다고 하면 할수록 깊숙히 무망한 세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어불성설의 미궁속으로......,

<저 나와 같은 룽바의 꼿꼿함 속에서 나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