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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사가르마타:하늘바다everest를 걷

히말라야, 사가르마타(하늘바다)를 걷다.(6)

by 김형효 2008. 9. 21.

- 아이의 웃음이 상쾌해서 살맛나는 어른들의 아침

 

 

히말라야 기슭을 걷다보면 이곳 사람들의 시간은 굽이굽이 당나귀의 걸음같은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계곡의 깊이만큼 혹은 경사만큼의 시간이 흐른다. 그런 굽이굽이만큼 계곡의 깊이를 타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만큼의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 누구도 급하게 보채지 않는다. 지금 머문 자리가 천상인 것처럼 유유자적한 모습 적요로운 모습으로 시간은 능선을 오르는 산양의 거리와 산양의 걸음만큼씩 고즈넉한 걸음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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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울만치 무겁게 짐을 지고 가는 짐꾼들의 걸음만큼 여유로운 속도로 흐른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이 느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무게에 우리는 탄복하고 그들이 그 무게에 눌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딛으면서도 의연하게 흘러가는 시간처럼 넉넉함을 떠올리는 것이다. 일이 허겁지겁 살아가는 모양이지만, 결코 그들에게서 허겁지겁 살아간다고 생각할 틈이 없다. 그들은 모두가 성자의 걸음과 성자의 맵시로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날 우리에게는 산사의 도인조차도 허겁지겁, 혹은 헐레벌떡하는 속도로, 모든 시간이 여유로 상징되는 사람들의 시간조차도 사냥하듯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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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시간의 틀 안에 갇혀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불편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런 나에게 많은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멍청한 놈(?)쯤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멍청한 이놈은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시간이 그들을 사냥하고 있음을 난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모두가 똑똑하다보니 정말이지 멍청한 놈이 게으르게 바라보며 걱정하는 냥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결국 누가 멍청한지 누가 바른지도 분간이 안 되는 카오스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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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안에 그 시대의 자궁 안에서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머니의 태생이면서 이 시대의 태생인 인간은 줄곧 어머니의 태생의 기억조차 잊고 산다. 때로 멍청해지게 되면 더러 그런 생각도 잊지 않게 되니 때로는 멍청해지기를 권한다. 그것은 자기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바깥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쳐가면서, 바깥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면서, 자기의 진리인 냥 뚱한 착각을 하는 나의 벗과 지인과 현대의 자궁 안에서 함께 태어난 일란성의 혹은 이란성의 혹은 아수라의 현대인들에게 자기 안의 진리를 찾는 데 좀 더 세심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주기를 권해본다. 물론 나의 깜냥으로 권하는 것들이 무슨 대수로운 이해를 얻을 일이겠는가? 하지만 나도 그 자궁안의 사람들을 어머니 보다는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 안의 꿈틀거리는 인류애 한 가닥은 있으니 그런 냥으로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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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하루가 없다. 나는 어느덧 사십을 넘기고도 네 살이나 더 먹어간다. 그런데도 아직 멍한 사랑에 빠지지 못하고 있다. 그저 지 잘난 맛에 잘난 사랑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허방 속을 허망으로 하 세월하며 살아가기 하느라 허덕이고 있는 것이겠다. 지 잘난 놈들이 보통은 고독하잖은가? 물론 글쓰기도 그런 자아의 각성에 갇혀서 자아를 공 굴리느라 처절하게 우는 울음 빛들 아닌가? 나의 울음 빛은 그 누구도 매만져주지 못하는 것이니, 나 홀로 그 울음 빛이 고귀하여 스스럼없이 자기를 품고 쓰러지는 것이겠지. 그러니 누가 나에게 안길 틈이 있는가? 이제 나도 나의 사십을 안고 앞으로는 네 살 너머의 세월 속에서 찬찬히 타인의 울음 빛을 서럽게 쫓아가 볼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 타인의 울음 빛 속에 내가 서럽게 울어볼 울음 빛이 깃들어 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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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이 맑다. 구름은 산 속 나뭇가지 사이로 숨어들고 밤하늘의 어둠은 그 가지 사이를 두런거리며 두리번거리며 눈물짓느라 이슬이 되어 비추고 아침은 그 눈물을 달래느라 햇살로 빛을 옮겨 딛고 일어난다. 찬란한 나의 인생, 너의 어린이처럼 세상이라는 너의 그림자처럼 말이다. 이제 산 속에 깃든 어둠과 아침과 빛의 조화가 널 깨우고 날 깨우고 저 하늘빛 가까운 곳으로 스스럼없이 가득히 피어난다. 깊은 절망은 딛고 깨어난, 찬란한 장밋빛 오월처럼 깊은 어둠이 푸른 하늘을 안고 깨어나는 아침이다. 온통 힘차게 기지개켜며 지치지 않은 활기가 가득한 아침이다.

 

  

  

사람들은 중얼중얼, 자기 안의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생긋이 뜻 모를 웃음을 웃으며 어른을 달래주는 엄마 품의 어린이처럼......,

그 작은 아이의 웃음이 상쾌해서 살맛나는 어른들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