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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사가르마타:하늘바다everest를 걷

영혼의 바다-에베레스트(사가르마타:하늘바다)를 걸으며 사색하다.(11)

by 김형효 2008. 10. 17.

- 히말의 기슭에 들면 자연의 생로병사도 본다. 

 

 

바람이 저 산나무를 붙들고 있는 사이,

그 사잇길을 따라 사람의 생사 여탈권을 쥔 야크가 길을 간다.

 

인간들이어, 산에 사는 인간들이어,

그대들은 나로 하여금 생을 잇느니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음으로

 

바람에 흔들리다 바람에 흔들림을 붙들고 있는 나무!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사랑을 보는 듯하다.

 

사랑을 붙들다 사랑을 흔들다 사랑에 흔들리는.....,

 

히말의 기슭에 들면 자연의 생로병사도 본다.

바람의 생로병사도, 나무의 애증도

구름의 생로병사도 히말라야의 품 속에 따뜻한 체온도

사람의 것과 자연의 것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순간, 그것들이 나를 어루만져준다.

그리고 나와 하나가 되어준다.

어쩌면 다시 귀소본능의 염(念)을 안고 히말의 기슭을 걷다 히말의 기슭을 벗어나게 되는 것인가보다.

 

 

저 바람에 묶인 철다리를 걷는 야크와 사람들은

누가 사람의 걸음인지 누가 짐승의 걸음인지 분간하지 않는다. 그저 산 걸음만 있다.

 

저 철다리에도 "옴마니 반메홈"이 있다.

살리고 있는 것이다.

생(生)을 멸(滅)하여 사(死)가 된다면 그 사(死)를 멸(滅)하여 생(生)을 이룬다.

낮은 수준의 선문답에 머무는 이 말은 낯선 종교적 윤리나 교리가 아니다.

힌두교에도 그런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들어보았던 신(神)!

시바는 파괴의 신이며 재건의 신이다.

 

*시바(산스크리트로 '상서로운 존재'라는 뜻)는

모순된 듯한 특징들을 통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복잡한 인도의 신 가운데 하나이다.

파괴자인 동시에 재건자이며 위대한 고행자이자 관능의 상징이다.

또한 영혼의 자비로운 목자이자 분노에 찬 복수의 신이기도 하다.

 

 

목동처럼 야크의 뒷 등에서 혹은 당나귀이 뒷 등에서 그들을 몰고 있는 사람~!

간혹 걸음에 열중하고 걷다보면 마치 그 뒷 등의 사람이 성자처럼 보이다가

그 뒷 등에서 사람의 주문을 듣고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야크나 당나귀가 성스럽게도 보인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탈진 길도 저 돌 길도 묵묵히 묵언 수행자처럼 걷는 야크나 당나귀를 보고 있노라면

나그네의 걸음도 성자처럼 넉넉하고 여유로워진다.

 

나그네의 빠른 걸음을 멀리 바라다보이는 흰구름의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저 산을 오르는 짐꾼들 야크와 당나귀로 부터 배우는 것이다. 

 

나는 그런 감흥을 외면하지 못하고 친구의 팔짱을 끼는 마음으로 야크의 뒷 등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도 반갑다는 듯 아무런 놀람도 없이 뒷 등을 내게 맡긴다.

마치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저렇듯 고요로운 심성의 야크와 당나귀들을 보고 길을 걷는 길을 사람도 함께 걷는다.

성자를 앞세우고 뒷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먼저 본다.

나는 저 짐꾼의 미소를 보고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삼존마애불상을 떠올린다.

<충남 서산의 삼존마애불상>

 

바람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 히말의 기슭을 걷는 사람,

달리 설명할 길 없는 고통스런 짐꾼의 일을 하는 사람

그런 모든 일들이 낯선 나그네의 눈길에 놀라움 뿐이다.

 

그는 그저 사진을 찍는 나를 바라보면서 고마움이라도 표하는 사람같다.

낯설 산길에서 난생 처음 본 사람이 자신을 향하여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데

어찌 저런 웃음을 웃어줄 수 있을까?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저 고마운 사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저 분을 잊지 않고 살 것이다.

두 번의 네팔에서의 전시회에서 나는 저 분을 찍은 또 다른 사진을 전시장에 걸었다.

현지의 네팔 사람들도 저 분의 웃음을 바라보고 함께 감동을 주고 받았다.

나는 저 분을 내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짐을 진 사람들의 행렬이다.

한 때는 야크가 가고 한 때는 당나귀가 가고 한 때는 사람의 행렬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나그네가 걷는다.

 

 

걷다가 멈춰서는 나그네를 위해 사뿐히 길을 비켜주는 산 사람과 야크와 당나귀들......,

저 멀리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가 흰 구름 사이로 비친다.

우거진 숲이 버거운 숨을 터 준다.

 

 

한 때의 야크가 묵언수행을 하듯 비탈진 히말의 기슭을 이끌고 간다.

구름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그들의 걸음걸이는 묵묵하고 사뿐하다.

마치 느긋하게 날아오르는 바람처럼......,

 

 

쉬어가는 사람들이 부려놓은 짐들......,

우리네 지게처럼 보인다.

여섯차례 네팔을 찾았다.

에베레스트(사가르마타:하늘바다) 로지를 찾기 전에는 저런 지게 같은 장비를 본 적이 없다.

 

티벳사람들이 히말라야를 넘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그네,

쉐르파가 동쪽으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그네,

나그네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우리네 한국사람과의 문화적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안나푸르나 기슭을 걸을 때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을 만났을 때처럼 신비로운 상상에 젖는다.

낯설으면서 익숙한 상상......, 나그네의 여행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