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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걷기 여행/사가르마타:하늘바다everest를 걷

영혼의 바다-에베레스트(사가르마타:하늘바다)를 걸으며 사색하다.(10)

by 김형효 2008. 10. 15.

- 낯선 곳에서 그리움을 부르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안테나를 세우다보니 팍딩(Pakding)에서 톡톡(TokTok)을 오르다 대전과 서울에 전화를 걸었다.

나의 버릇이다.

한국에서도 산에 오르다 그 바람의 느낌을 사무실에서 혹은 공장에서 혹은 답답한 일상을 보낼 그리운 사람들을 위해

곧잘 전화를 해서 그 바람의 느낌과 그 바람의 향기 그리고 이런 저런 일상의 그늘을 벗어나기를 기원했었다.

나는 히말라야의 기슭의 생태적 환경의 풍부함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짧은 몇마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안녕을 빌었다.

 

<나비꽃(붓따리셔럭)이란 이름의 꽃이 나비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신비롭다.>

 

두리번 두리번 색다른 것들을 바라보면 곧잘 메모를 대신하듯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그것은 나의 기억의 창고로 깊숙히 집어 넣고자 하는 것도 되지만,

후일 내 기억의 곳간에 자리잡은 사람들에게 하나 하나 흰 살풀이처럼 풀어놓을 나의 식량이다.

서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나를 살리고 나와 진정으로 교감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다.

함께 걷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들과 현실의 것들이 있다.

나는 내가 걷는 하루 하루가 그들의 대리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는 일이라고 믿으며

때로 그들의 서정을 다래는 전령일 수 있음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염소(커시)가 마을 어귀를 걷고 있다. 사색에 잠긴 나그네처럼......,>

 

자유로운 방목은 사람의 삶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속박 속에서 보이지 않게 목덜미를 잡힌 채 살아가고 있지만

저들의 자유한 모습을 보면 마치도 넋을 놓고

노자처럼 장자처럼 철학적 사유를 즐기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히말라야의 기슭이 히말을 살리고 그 기슭의 것들은 히말의 신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모든 대상들이 경이(驚異)요, 그 경이는 사색의 그루터기로 자리잡고 있는 신령스런 것들이다.

 

<낯설길을 나그네로 만나 천연스런 웃음을 주고받았던 나그네이며 벗인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느 곳을 어떤 신심을 간직한 채 어디쯤 걷고 있을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네팔만의 낯설음이 아니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세계인이 커다란 이벤트로 정해 놓고 하나의 축제로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은 그렇게 인위적으로 조합해서 만난 것이 아니다.

각기 약속없이 자기 길을 열고 자기만의 의지로 삶을 사색하며 히말의 신비를 맛보고자 나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길을 걸으며 낯선 영혼을 사색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길에서 만나 길 위에서 도란거리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낯설음을 포근히 감싸안는 바람처럼 언제 어느 곳에나 그렇게 흐뭇이 웃어주는 나그네들......, 

 

<오방천이 감싸주는 히말의 기슭을 움켜쥔 산중의 집들, 마치 절간처럼 엄숙하다.>

 

저 날개같은 오방천들은 수많은 "옴메니 반메홈"이 새겨져 있다.

그 글 사이로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수많은 "옴메니 반메홈"이 나그네와 산중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조하고 있고

무사안위를 보살펴 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을 맹목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진심으로 그들의 신심에 감동하기도 하고

그런 신심이나 불심의 벽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비춰보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아들이지만, 영원히 신의 그늘 속에 살 것만 같다.

그것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면서 스스로 자연의  안위를 외면하지 못하는 자연의 종속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근원을 따라가보면 진정한 신은 자연이라는데 귀결될 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옴마니 반메홈"의 돌에 새긴 불경......, 산스크리트어의 사전과도 같다.>

 

어쩌면 현지의 산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하는 저런 글귀를 돌에 새겨낸 자체가 신의 영험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사람이 스스로 행한 신에 대한 기원의 불가사의한 창조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바로 그 점에 신의 신령이 있다고 믿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자신이 이루어낸 신에 대한 신앙심을 두고 신을 믿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인간을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불가사의로 정의 되어 보존되고 있는 인류의 유적들이기도 하다.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하늘바다) 가는 길에 마지막 검문소, 이 곳에서 출입증을 확인했다.>

 

산중에 자유를 막은 검문소도 수차례 반복되는 검문은 짜증을 유발한다.

만약의 사고와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익숙하게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팔의 두번째 수입원이 관광인 나라,

특히 히말라야 국립공원 입장료는 네팔이라는 나라의 주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수입원은 고르카(파병 영국군)용병 수입이다.

그래서 네팔의 많은 젊은이들은 고르카 용병을 통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있다.

영국은 네팔 용병에 대하여 가족까지 영국의 시민권을 주고 있다.

물론 네팔의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도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마치 조선시대 노비가 사대부가 되는 것처럼 일거에 신분상승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작을 피워 밥을 하고 물을 끓여 차를 내오는 부엌 풍경이다.>

 

따뜻한 아랫목이 따로 없다.

저 불빛 주변에 앉아 차 한잔을 받아 마시고 나면 금세 친숙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곳에서 몇 마디 주고 받으면 낯설음도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과 가족처럼 아늑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사색의 뒤 끝에 고요로운 밤이 무르익는다.

저 따뜻한 불빛 안으로 낯설었던 안타까움도 모두 사라진다. 

절로 안빈낙도를 자각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