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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낭만 넘치는 거리에서 대문호 푸시킨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다"

by 김형효 2009. 5. 13.

고개를 젖힌 채 팔짱 낀 모습이 사색 깊은 망명객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조형물 아래에는 푸시킨이 1820년부터 1824년까지 머물렀다는 표시가 있다.

 

출근길부터 비가 내렸다. 

오늘은 푸시킨이 머물며 작품을 창작하고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던 집과 그 거리를 걸어보겠노라 마음먹었다.

혼자는 아직 불안한 거리다. 사실, 말만 잘할 수 있어도 어떤 불안이 닥쳤을 때 헤쳐나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산 입 벙어리 신세니 어쩌랴 알아서 조심할 밖에는.

 

러시아어를 두 달 보름 배웠고 거기다 보름을 더해 우크라이나 체류를 늘려가는 중이다.

그러니 모두 합쳐서 한국에서 한 달 배웠고

이곳에서 한 달 보름 그리고 보름을 더 머물고 있으니 총 3개월이다.

그러니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버스 정류장 이름 대고 오가는 것이 전부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러시아어로 징검다리 소통이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뻔한 실력에 영어나 러시아어나 다 모자란 셈인데 그나마 신통방통이다.

그러니 홀로 기특하기도 하다. 어쩌다가는 홀로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

'너 어쩌려고 이곳엘 왔느냐'하는 허튼소리 같은 질문도 한다.

 

버스를 타고 중심지까지 갔다. 그리고 내려서는 걸었다.

가는 길에 프린터를 구입할 생각으로

전날부터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린 김에 시내 중심상가의 컴퓨터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집 근처 가게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그냥 푸시킨의 집을 향해 걸었다.
그 집 벽에는 멋지게 바지춤을 움츠린 채 팔짱을 끼고 폼 좀 잡은 푸시킨의 청년 시절의 모습이 도판에 새겨져 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시를 빗대어 호기있게 말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날마다 삶이 날 속이는 것처럼,
어쩌면 요즘 우리네 국민들의 일상, 우리네 서민들의 일상이 그런 것일까?
'삶이 그대를 속이면 그대가 생활을 속여 버려라!' 내게 무슨 그런 재간이 있었겠는가?
그냥 견딜밖에 별방법 없는 처량한 신세를 웃고 살려다 보니, 억지로 달래며 호기를 부려본 시절에 말이다.
 
대문호 푸시킨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다
푸시킨의 집 앞 왕복 4차선 도로는 차량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길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위한 산책로라 하기도 그렇다.
 

푸시킨의 집을 와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낭만이 넘치는 풍경이다.

왕복 4차선 도로는 차량이 다니지 않는 거리다. 

가로수 사이 가로등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멋진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그게 꼭 클래식이 아니면 또 어떤가?

우리네 팔도강산 중소도시까지 전력낭비 하느라 루미나리 거리를 조성해놓은 것을 보았다.

그런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가 아니라도 이렇게 대로에 음악이 흐르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없이 부러운 생각을 해본다.

아마 푸시킨은 이런 낭만을 예견하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읊조렸을까?

 

자료에 의하면 푸시킨은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현 니꼴라예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니꼴라에프에서 30분 거리인 오데사의 총독과 충돌했던 것은 그가 니꼴라예프에 머물던 망명시기다.

 

아무튼 나는 전부터 찍고 싶었던 대문호 푸시킨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언젠가 좀 더 여유 있을 때, 오늘 보다 더 멋지게 찍어보리다.

아무튼 비싼 물품을 소지한 외국인은 스킨헤드나 못된 친구들의 표적이 된다고 해 그만두었다. 

연수원과 대사관에서 현지사정 교육을 너무나 잘 받은 탓(?)이다.

아무튼 그렇게 몇 컷을 연사로 찍어대고 곧 레닌의 활동공간이었던 청사를 향해 걸었다.

 

세계사의 한 흐름을 일궜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

레닌이 머물며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를 다져가던 건물. 지금은 허물어져가는 이 곳에 문화인 협회가 들어서 있다.

 

오늘은 현지인 없이 혼자서 가는 걸음이다. 앞 뒤 주위 살피며 잰걸음이다.

아마도 누군가 카메라 앵글로 나를 추적했다면 여지없이 공작원들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쯤 되었을 법하다.

그렇게 10분쯤 걸어 현 니꼴라예프 시청사와 경찰청사 사이에 있는 다 허물어져 가는 니꼴라예프 문화인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 건물은 과거 레닌이 독일 망명을 갔다가 돌아와서 어려움에 처했다가 다시 은둔할 시절에 활동했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곳에 레닌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난 또 잽싸게 무슨 다큐멘터리 장사꾼처럼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꿈만 같은 역사의 현장이다. 우리만의 것이 아닌, 세계사의 한 흐름을 일궜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내게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잠시 지워진 존재처럼 인식될 뿐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 언제 다시 부활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국가였던 구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었던 그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다시 자본주의의 대세 속에 숱한 위기를 겪고 있다.

 

레닌이 머물며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를 다져가던 건물.

지금은 허물어져가는 이 곳에 문화인 협회가 들어서 있다.

 

혹시 아는가? 지금의 자본주의가 무덤을 쓰는 날, 또 다른 변혁의 흐름 속에서

레닌의 사회주의가 아닌 또 다른 형식 모델을 가져왔을 때 적어도 효과적인 학습테제가 될 수 있을지?

시대의 흐름 앞에 우리는 엄숙하게 바라볼 눈을 가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뭐 내가 사회학자도 아니니 그저 망상 같은 이야기로 접어두더라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으리라.

 

쉽게 흘러가는 바람처럼 잊어버리고 말 역사는 없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바람조차도 기억되지 않는가 말이다.

역사의 흐름이 결코 뒤바뀐다고 해서 안도할 일도 외면할 일도 없다. 끝끝내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그리고 끝끝내 버려야 할 '악'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과 악이 만나서 소통할 때가 온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우리 시대는 어쩌면 그런 만남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 사색에 빠져본다.

나의 고질병은, 중요한 그리고 분명해야 할 상황에서 자꾸 멍청해진다.

그것은 내가 외면된 수많은 바보 같은 현실의 경험 때문에 날 멍청이로 돌려세우는 못난 바보행세다.

 

휴무일을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가는 느낌의 니꼴라예프

니꼴라예프는 과거 레닌의 혁명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니꼴라예프 시청사 앞에는 레닌 동상이 전진의 기상을 안고 서 있다.

 

사색이 깊었나 보다. 그곳에서 10분쯤 더 걸으면 수호믈린스키 대학교다. 

여름비라고 해야 할지 봄비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잔비를 맞으며 학교에 들어섰다.

바깥에서부터 한산한 느낌이다. 멋모르고 교무실에 들어섰다. 교무주임인 이리나 교수와 조교 알라가 있었다.

기쁘게도 알라는 내가 만들어 장식해 둔 한글 자모판 앞에서 내가 만들어준 공책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와우! 하라쇼 알라!(ХОЛОШО, АЛЛА)! 좋아, 알라!'라고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리나도 눈웃음을 짓는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에도 이미 이리나 선생과 그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결코 부정적일 일이 아니니 즐거울 수밖에 더 있는가?

낯선 나그네 한국어 선생 입장이니 말이다. 오늘도 두 권의 한글 공책을 더 만들었다.

 

그 틈에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저 평범한 안부전화다.

며칠 전 생신을 맞으셨던 어머니께서 '너나 잘하고 있어라!'하시는데 

울컥 막혀오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참아낼 내공도 있다.

전화 통화는 끝났고 다른 교수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아 이상스럽다 생각하고 있는데,

알라가 오늘은 시험이 끝나 교수들은 휴무고 다음 주 월요일도 휴무란다.

그러니까, 교수들은 4일 연휴인데 나는 휴무를 몰라서 출근한 것이다. 

 

내가 처음 니꼴라예프에 오던 날이 지난 4월 17일이다.

그때부터 4일 연휴가 이번까지 세 차례다.

마치 휴무일을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가는 느낌이다.

안 그래도 그다지 바쁠 일이 없는 지금인데 연이은 휴무일은 날 더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어쩌랴! 기쁘게 받아들이고 휴무일을 준비기간으로 삼아 교재 개발을 하자.

곧 퇴근을 서둘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리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