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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내가 만난 세상 이야기

참으로 어머니를 문득 만난다면

by 김형효 2009. 6. 23.

- 북한의 시인들(16) 리종덕 시인

 

참으로 어머니를 문득 만난다면

리종덕

참으로

그날이 와서 통일이 와서

문득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아아, 너무 더 억이 막혀

수수십년 새겨온 그 말들을 다 잊고

가슴 터지고 심장이 터지는 소리

다만 엄마- 하고 울릴게다

 

장에 갔던 어머니 늦어만 와도

엎어질 듯 달려가 안기던 목소리

하루만 떨어졌다 만나도

마냥 응석을 부리던 목소리

 

세 밤 자고 오마고

외가에 간 어머니건만

까맣게 기다리던 그 세 밤이

천번 만번 지나도록 못오신 어머니

 

칠순도 더 넘은 백발이런만

상기도 내 머릿속엔

아주까리 기름이 반드럽던

가리마 반듯한 그 까만 머리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만나기전엔 더 먹을 수 없는 이 나이옵고

이 아들을 보기전엔

차마 눈을 감을 수 없는 어머니려니

 

사랑은 쇠를 녹인다 하였거늘

이 아들과 어머니 사랑만이 아닌

온 겨레의 사랑이 합치면

분렬의 콩크리트 장벽을 어찌 못 허물랴

 

또 한층 높이 오르는

통일거리 건설장에서

새날을 맞으며

뜨겁게 새겨보는 마음

 

어머니와 이제 만난다면

나이도 세월도 다 잊고

헤여질 때의 그 나이로 되돌아가

어머니 치마폭에 안기리다

 

참으로 통일의 그날이 오면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내 겨레 내 민족이 합쳐지는 소리

삼천리를 그대로 흔들어 놓을게다

 

오오, 지열보다 뜨거운 통일의 환호성

땅도 하늘도 아닌 바로 내 가슴속에서

엄마- 하고 터져

지구를 통째로 흔들어 놓을게다!

 

우리는 언제나 조국의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그처럼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있게 한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렇게 통일을 어머니처럼, 어머니를 통일처럼 학수고대하는 시인의 애타는 심정이 가득 담겨있는 시이다.

사람들은 때로 파벌로 나뉘어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형제의 다툼으로 인식할 때 그 다툼은 다툼으로 길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가져와야 하고 그 다툼은 깊은 애정과 뼈아픈 반성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데 역량이 되어 모여들어야 한다.

그럴 때 가정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나라의 일, 민족의 일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사하러 나간 엄마다. 세 밤 자고 온다는 기약을 하고 간 엄마다. 그러나 기약없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필자도 어린 시절 긴 겨울밤, 그것도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밤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를 아우 둘과 마루에 나와

함께 울며 애타게 기다려본 적이 있다. 그런 아이, 그런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엄마처럼 통일을 기다린다.

애끓는 눈물을 담고 있는 그것은 절규다. 통일을 갈망하는 애끓는 심정은 지구를 통째로 흔들어 놓겠다는 결기가 담긴다.

그가 고대하고 고대하는 리종덕 시인의 통일과 남녘 하늘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통일은 다른가? 전혀 다른 통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통일의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은 안타깝고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것이 멀어져버린 지난 60년의 이민족의 지배가 우리를 눈을 멀게 한 것인가?

 

오로지 자본의 먹이사슬에 영혼도 몸도 다 맡겨두고 집나간 어머니를 외면하는 자식들처럼 말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우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외우고, 이육사의 <광야>를 외우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하고, 윤동주의 <서시>를 되뇌이면서 민족의 통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 안타깝다. 광화문에 긴 칼을 차고 우뚝 선 이순신 장군을 외우는 사람들이

민족의 단결에는 반대하고 한일, 한미 공조에는 관심을 두는 현실은 또 무엇으로 설명을 할까?

오로지 같은 피붙이 내 민족의 반쪽만을 탓하는 구태는 이제 벗어야 한다.

그러니 민족공조는 다시 한 번 되새김할 우리의 운명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6.15 공동선언의 가치지향이요.

10.4선언과 9.19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이가 들어 관조적이 될 수 있을 지언정, 나이가 들며 보수화가 된다는 것은 누가 한 말인가?

보수화란 우리에게 침묵이나 방관으로 행동을 하지 않는 악인이 되는 것과 같은데, 나이가 들면 악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모두 아이적 엄마를 찾는 사람처럼, 아이 적 불렀던 통일의 노래를 불러보자.

커가면서 부르지 않아도 좋은 통일의 노래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더욱 뼈저리게 불러야 할 통일의 노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순간 다시 한 번 우리가 장사하러 집 나간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자식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되어 나라의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상화 시인이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지식인으로서 무기력에 빠져 술과 호색 객으로 허송한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식인으로 후일 일본 유학 당시 관동대지진 때 보았던 일제의 만행을 경험한 후 민족적 자각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그 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써냈던 것처럼 우리 소시민들도 엄혹한 세계사

특히 동북아에서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이라는 4강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돌아온 들에 왜 봄은 오지 않는가?>시인 이기형 선생님의 시 제목이다. 시의 서두는 이렇다.

“그해 북한산이 춤추던 날/빼앗긴 들은 돌아왔건만/누구라 해를 가로막아/겨레의 봄은 오지 않았다/뉘 작간이냐/원흉은 누구냐/ 후략”

우리 모두가 <돌아온 들에 왜 봄은 오지 않았는가?>를 뼈저리게 각성하며 고민해야할, 공부해야할 시절이다.

위기의 시대에 남북의 공존을 위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시 한 번 새겨야할 교훈인 것이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통일은 너와 나로 보지 말고 지금의 눈으로 보지 말고 이순신 장군의 눈으로 보라!”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