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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방금지은 자작시 노래하는 네팔시인들

by 김형효 2011. 7. 21.

 

 상그릴라(SHANGRI-LA)의 땅, 네팔에서(15)

 

오늘은 나가라곳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채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지금 네팔은 축제분위기다. 조용한 축제다. 네팔인 최초로 네팔어로 작품을 쓴 시인 어챠르야 바누벅타(Bhanu Bhakta Acharya)의 탄신을 축하하는 행사다. 기자는 3년전 그의 존재를 알고 필자의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다. 어차르 바누벅타, 어챠르야 바누벅타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포털을 검색하면 유일하게 검색되는 블로그 중의 하나다.

네팔의 한 노시인이 그의 초상화를 받쳐들고 있다. 네팔의 군인과 일반인, 학생 모두가 축제에 함께 했다. 부럽기도 놀랍기도 했다.

올해로 195주년 탄신 기념일을 맞이하는 네팔 시인의 축제인데 그 축제의 규모가 놀랍다. 난 네팔인들의 이러한 축제를 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한다. 이들이 그들의 언어를 정립한 어챠르야 바누벅타의 탄신을 축하하는 것과 한국인인 내가 세종대왕을 축하하는 것이 너무 달라서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김소월 시인의 탄신 혹은 정약용 선생 혹은 또 다른 위인의 탄생에 대해서 이처럼 축하하고 기념한 적은 없는 것 같아서다.

 

 

기자를 초대한 네팔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 기자에 의해 그의 탄신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한 네팔의 시인 리샵 기미래(Rishab Ghimire)에 의해 행사에 대해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구왕궁 인근의 타멜거리에 있는 가든 레스토랑에서 그의 탄신일 하루 전날 많은 네팔의 시인들이 어린 아이들이 백일장을 하듯 가든 레스토랑의 벤취 이 곳 저 곳에 앉아서 글을 짓기 시작했다. 오후 5시에 초대받은 기자도 함께했다.

저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동도 없이 글을 짓던 시인들이 다시 가든 호텔의 정원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기자를 놀라게 했다. 금방 지은 시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선율로 리듬감 있게 들렸다. 우리의 낭송가들의 시도 아름답지만 금방 지은 시를 노래하는 그들을 경이롭게 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였다. 아! 난 아마추어구나? 기자가 그동안 네 권의 시집을 내고 그 시집에 실린 시보다 훨씬 더 많은 시를 지었지만, 난 내 시를 노래하지 못한다. 

어린 소년, 소녀처럼 서로의 감성을 겨루는 백일장같다. 네팔의 내노라하는 시인들이 백일장과 같은 글짓기를 하고 있다. 잠시 후 그들은 가수처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시인들이 둘러앉아 금방 지은 시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듣고 있다.

부러운 네팔 시인들, 그들의 전면에 어챠르야 바누벅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다시 새롭게 배운다. 
그의 시는 리듬에 실려 노래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자도 3일 동안 바쁘게 그의 축제에 초대되었다. 한 텔레비전과 Star FM과의 인터뷰도 가졌다. 한 행사장에서는 네팔어로 번역된 기자의 시가 네팔 시인에 의해 낭송되기도 하였다. 이어서 학교와 네팔학회에서도 축제는 이어졌다. 

네팔의 한 텔레비전에 기자가 소개되었다. 짧은 인터뷰를 가졌고 기자도 글짓기에 함께했다는 아나운서 멘트도 있었다.

아래는 기자가 3년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다. 

네팔 현대 문학은 1814년 탄생하여 1868년 고인이 된 어챠르야 바누벅타(Bhanu Bhakta Acharya)에 의해서 태동하게 된다. 그의 힌두 신화집 라마야나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것은 네팔인들에게는 중요한 선물이었다. 
지난해 지금은 인도령이 되었지만 그가 태어난 아삼에서는 그의 자얀티(생일, 7월 13일)을 맞아 거대한 축하행사가 열렸다. 국가는 그를 억압하였지만, 결국에는 그의 생일은 네팔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그는 네팔인으로서 처음으로 네팔어를 시인의 언어로 쓴 사람이다. 네팔에서 그 이전에 산스크리트를 시의 언어로 쓴 사람은 없다. 그 중 유명한 그의 저서로 카트만두 계곡이 잘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의 삶의 색채를 그의 문장에서 물 흐르듯한 찬양을 통해 잘 표현되고 있다. 

아래 글은 가난한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정리한 그의 글을 기자가 번역한 구절이다.

잔디 깎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터전과 약간의 돈을 벌고, 또 그녀는 그의 가족들을 위해 좋은 희망을 만들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 기억될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드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풀 베는 사람의 삶, 비록 내가 부자라고 해도 그처럼 많은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 -(Bhanu Bhakta Acharya)-

바누 벅타 아챠르야라는 네팔어 문학의 빛나는 스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하여 네팔어 문학을 풍성하게 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아마도 유일한 바누 벅타 아챠르야의 네팔어 문학은 문학적 명성을 가진 가정은 물론, 인도의 여러 부분에서 뛰어난 문학가다. 

바누 벅타의 전 생애는 장미의 침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삶에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이 연속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임무에서 네팔 문학에 기여하는 데 있어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역경을 풍부하게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전환시켜 내었다. 우리는 그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아챠르야 가문의 아들로 츄디 베시 람가(Chundi Beshi Ramgha)라는 마을에서 1814년에 태어났다. 이 마을 간다키(Gandaki) 영역에 있는 다나훈(Tanahun)지구에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것 저것 많이 읽었다. 그가 아주 잘생긴 소년이지만 그의 친구들과 전혀 달랐다고 한다. 그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혼자있기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엄청난 사랑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나중에 시를 쓰고, 그가 진정으로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 

바누 벅타는 많은 작품을 쓰는 작가였다. 그는 이런 창조적인 능력으로 아름다운 시들로 일반적인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작을 하는 그런 능력을 발휘했다. 불행하게도 그는 많은 시를 썼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에 작품을 읽어내고 평가할 수 없다. 

사실, 그의 독창적인 시(詩)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바누벅타의 시들은 대부분 1820년부터 1846년 사이에 쓴 시들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 젊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문학적인 애정을 갖고 인도를 찾았다. 바누벅타(Bhanubhakta)는 오래된 시집을 사는 것으로 문학에 대한 애정을 충족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몇 달 동안 바나라스(Banaras)에서 보낸 다음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그는 카트만두의 아름다움에 압도됐다. 그는 아름다운 주택과 궁궐 사람들의 무리가 큰 시장을 독점하고, 깨끗한 거리, 아름다운 사원, 수공예품, 스트레이트 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카트만두의 아름다움은 젊은 시인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는 곧 카트만두에 상주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의 친구인 다르마두타(Dharmadutta)는 그 당시 유명한 점성가의 집에서 한 방에 머물며 그를 돕고 나섰다. 그는 카트만두에서 많은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그들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서로의 저술과 창작활동에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