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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구/이런 저런 사진 이야기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 안톤 체홉

by 김형효 2009. 1. 2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러시아어: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문화어: 안똔 체호브,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은 러시아의 단편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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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록 (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을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록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록 학교을 졸업한 반면, 체호프은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하므로서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록 모교로 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은 타간록에서 받는 장학금과 잡지의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은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으며,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을 한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편집] 전집

  • Sočinenija (작품), 10권, 편집 A. f. Marks, 1899-1902, 페터스부르그 (최초의 안톤 체호프 전집).
  • 30권 전집, 편집 Belčikov, D. D. Blagoj, G. A. Bjalyj, A. S. Majsnikov, L. D. Opulskaja, A. I. Revjakin, M. B. Chrapčenko, 1974ff. 모스크바.

[편집] 대표작품

단편

  • 〈관리의 죽음〉(1883)
  • 〈우수〉(1885)
  • 〈키스〉
  • 〈사랑에 대하여〉
  • 〈귀여운 여인〉(1898)
  • 〈약혼녀〉(1902)
  •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1899)
  • 〈카멜레온〉(1884)
  • 초원〉(1888)
  • 6호 병실〉 (1892)
  • 사할린섬〉(1890)
  • 〈아리아드나〉
  • 결투〉(1892)

체홉은 1860년 1월 17일 흑해에 면한 남 러시아 항구 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돈으로 자유의 몸이 된 농노였고 부친은 상인이었다.
중학 시절부터 연극과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체홉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모두 모스크바 빈민가로 이주하자 혼자 남아 하숙을 하며 고학을 했다.
그러나 체홉은 타간로그시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고 생계를 위해 주간지에 작품을 기고하기 시작하면서 문학적 생애는 시작되었다.

1886년 최초의 단편집 <잡화집>이 출판되자 각계각층으로부터 대환영을 받았고, 이 또한 그를 문학가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다.
1889년 대학을 마치고 1890년 결핵을 앓으면서도 혼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사할린 섬으로 여행하면서 방대한 보고기 <사할린 섬>을 1895년에 발표하였다. 여행 후, 1892년 <6호실>, 1894년 <3년>, 1895년 <다락방이 있는 이층집> 등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1898년 <상자에 들어간 사나이>, <까치밥나무>, <귀여운 여인>, 1899년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1902년 <약혼녀>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발랄한 기지와 풍부한 웃음의 유머소설로 곧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번뜩이는 재치와 웃음을 일게 해주는 것으로 독자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4대극이라 불리는 1896년의 <갈매기>, 1897년의 <바이냐 아저씨>, 1901년의 <세자매>, 1904년의 <벚꽃동산>이 있는데 그는 만년에 극작에 주력하였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스타니슬라브스키'를 만나 연극사의 새 시대를 열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1880년대 쓴 <플라토노프>, <이반노프>, <숲의 주인> 등의 희곡에서는 주인공이 모두 인생에 절망하여 자살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의 4대극에서는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다시 일어선다. <벚꽃동산>의 젊은 세대인 '아냐'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생활에 뛰어든다. 이 같은 사실은 미래에 대한 그의 신뢰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강화되었음을 가리킨다.

1899년 10월 26일 <바아냐 아저씨>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갈매기>의 초연 때와 같은 열광적인 환영은 받지 못했다.
1901년 5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올가 끄니페르'와 결혼한 후 1902년에 <벗꽃동산>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여러 번 개작을 거듭한 끝에 1903년 가을에야 완성했다.
1900년 톨스토이· 코롤랭코와 함께 한림원 명예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고, 1904년 7월 요양지인 남독일 '바덴바이레르'에서 4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짧은 생애 동안 500편의 소설(400편의 유머소설)과 18편의 희곡을 쓸 정도로 단편과 희곡으로 일관한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