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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낯선 여행지의 자존의 흔적 같은 문화유산을 만나다.

by 김형효 2009. 4. 14.

지방 답사 보고서

 

우크라이나에 온지도 어느 새 한 달이 지났다. 어느 새라는 말을 쓰기에는 다소 어색하기도 하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어느 때는 몇 달처럼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말을 맞아 구체적인 지식도 사전의 지식도 없는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동행하는 선배단원과 행정원이 있어 그저 마음 편하게 떠났다.

 

중국 대륙을 17시간 달려본 기차 여행과 비교되는 시간이었다. 지평선 너머의 일몰에 비치는 찬란한 노을빛은 보지 못했지만, 오며 가며 여행길에 느끼는 광활한 대지의 품은 바라볼 수 있었다. 넓은 세상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도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도 그 사람이나 국가의 규모에 의해서도 다르게 인식된다는 생각을 기차 안에서 그리고 임대한 다인승 자동차에서도 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 바로 그런 느낌과 기대들을 편하게 서술해보려고 한다.

 

 

두 번째 방문지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권해서 정해진 곳으로 알고 있다.

역사의 흔적이 아픈 상처로 남아있지만 현재는 평화롭기만 했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여자 단원들은 키예프 시내를 돌아본 듯하다. 남자 단원들은 수업이 끝나자 곧 유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차 시간에 맞춰 옷을 맞춰 입고 늦은 오후 해도 넘어간 시간에 키예프의 역에서 만난 일행들과 첫 여행의 설레임도 나눌 겨를이 없이 열차에 올랐다. 꾸페라는 열차는 4인이 1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선배단원들로부터 들어온 열차였다. 중국의 열차와 동일한 모양새의 열차였다.

 

나는 선배단원, 행정원과 꾸페의 같은 룸에 탔다. 이미 여러 차례 인사를 나누었고 술잔도 기울였던 터라 자연스럽게 와인과 맥주잔을 비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취기가 오른 나는 일찌감치 잠에 취했다. 새벽 탁한 꾸페 환경 때문에 뒤척이다 뒤척이다 잠에서 깨었다. 참을 만큼 견딜 만큼 견디다. 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그나마 장거리 여행에서 누울 자리가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조금은 싸늘한 느낌이 드는 아침이다. BOKJAL(역)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아직까지 역명으로 알 정도로 사전 지식이 없었으니 내가 참 아둔하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모든 스케줄과 여행 일정이 맡겨진 여행(?)이다. 물론 현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음식을 먹거나 구경을 하는 것도 정해진 시간에 일행들과 만나는 것 말고는 자유롭다는 사전 해설은 들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여행지에 대하여 떠나는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현지에서 또 다른 여행지를 갔을 때 좋은 구경은 했는데 일행도 그렇고 선배단원도 그렇고 그 지역의 지명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참으로 아쉽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운전기사 아저씨에게라도 물어볼 것을 하는 후회가 든다. 멋진 곳을 보고 <그냥 멋진 곳이 있었다.>라고 밖에 말 못하는 여행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10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온 성곽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코자크 병사들의 혼이 서린 성곽은 아직도 굳건하기만 했다.

 

첫 번째 간 곳은 호틴(ХОТИН)이라는 곳이다. 영어식 표기로는 KHOTYN이었다. 여행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듯 일행들의 추억을 담아 주다가 더러는 내 나름대로 동영상과 사진을 찍었다. 이국의 바람결에 멋진 사색이 깃든 영상과 풍경들로 가득하여 부자가 된 듯하다. 더구나 우리가 보낼 2년이라는 세월이 이곳에 깃들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사진과 동영상으로도 아쉬워 1,000년의 역사(1,000 YEARS OF HISTORY)를 나름의 방식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든 홍보용 책자를 한 권 구입했다. KHOTYN이다. 우크라이나 돈으로 10그리브나(약1,700원)를 지불했다.

 

처음 입구에서 바라볼 때는 그저 멋진 성이 하나 있구나? 라고 보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제법 규모 있는 강과 어우러진 성곽은 천연의 요새였다. 인간의 지혜의 빛이 발하는 것은 위기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또 그것을 지켜가려는 의지에서 섬광처럼 발현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 받는 느낌이다. 저렇게 섬광처럼 발현된 지혜의 결정체가 그들을 세우는 자존심의 기반이었으리라. 사람은 어쩌면 지나가버린 과거 속에 자랑스런 조상의 것을 내면화하면서 사는 것이리라. 지금은 모자라고 보잘 것 없다하더라도 강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은 자신의 과거였던 조상의 것들 즉 역사적 유물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이 갖는 자존심은 의미있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지켜가지 못한 찬란하고 영화로운 역사의 흔적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유전적 실존이었던 것들, 그 존재가 있어 미래에 대한 기대도 강하게 발휘되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입만 열면 내세우는 조상의 옛 얼들, 수많은 문화재들은 우리를 살리는 영혼이리라. 지금의 풍요로운 음식과 축적된 자본과 기술만이 우리의 실존일 수 없는 것은 그런 문화적 유산들이 우리의 정신적 축적으로 의미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동굴이 있다는 곳인데 우리는 그곳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곳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이들에게는 잠시라도 기억될 흔적이 되리라!

 

새삼스럽다. 낯선 이국의 오랜 흔적을 보고 내 조국의 의미있는 문화유산을 정신적 축적으로 깊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내가 판단하는 그런 관점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까지 된다. 그러니 사람이나 국가 그리고 사회 세상의 모든 구성체는 그 존재의 안을 벗어나야 비로소 스스로를 바로 볼 수 있는 자각의 세계에 서는 것이라 했는가 보다. 물론 지금의 나의 안목이 어렵사리 그리고 어렴풋한 것일지라도 그런 관점에 지금 나는 동의한다.

 

특이한 것은 그런 인식을 보여준 사람이 낯선 나라 운전기사에게도 있었다. 그는 나이든 흰 머리의 노인이었다. 그의 수많은 정성스런 말들은 피곤한 여행자에게는 귀찮은 말버릇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고 역사와 인간의 존재에 좀 더 깊이 천착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는 내 관점에서는 향토사학자 이상이었다. 단지 그는 대절한 자동차의 운전기사였다. 하지만 틈만 나면 지나가는 곳마다의 역사적 사실과 그곳에 살았던 인물 그리고 그곳에 공장이나 회사들에 대해 설명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에게 음료를 권하기도 했고 비스켓이나 커피를 권하기도 했다. 그는 사양하였다. 다시 보고 싶은 낯선 여행지의 자존의 흔적같은 문화유산이 바로 <그>라는 생각이 든다.

 

한 마을의 오래된 고목같은 그가 늙어갈 세월 동안, 우크라이나는 자신의 자존의 흔적을 더욱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만나는 이방인들 틈에서도 그의 역사와 그 사람의 나라에 자존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내게도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 개개인에게도 그런 유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유전자가 촘촘히 성장해간다면 결코 지워지지 않을 역사(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유산의 나이테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 봉사자로 왔던 한 사람의 기억에 그는 오래 살아 숨 쉴 것이다.  

 

앙상한 상처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그들이 무엇을 지켜가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 곳의 유적을 찾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유적지 인근의 풍경에 압도되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곳이었다. 고향의 물레방아가 돌아갈 것만 같은 한적한 시골에 오래된 성곽과 골조만 남은 건물은 철원의 노동당사처럼 몰골만 남은 역사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의 마을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런 마을들이 이 역사의 흔적도 품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된 도시 깜야녜쯔 빠돌스키(КАМ’ЯНЕЦ ПОДОЛЬСЬКИЙ)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우크라이나의 실체와 만났다. 물론 호틴에서도 오래된 성곽이 있는 아늑한 시골 마을에서도 그런 것을 조금은 짐작하며 보았다.

 

평화로운 도시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는 현지인들, 꼭 깊은 산속에 흐르는 물을 보아야만 안빈낙도의 삶은 아니리!

 

나는 그곳에서 동료단원에게 정말 좋은 곳이라고 말을 건넸다. 동료단원도 기다렸다는 듯 그런 말을 건넸다. 나는 어색함이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문을 텄다. 그것은 즈뜨라스뜨부이쩨! 안녕하세요! 그들도 반갑게 응대를 해주었다. 함께 간 동료가 내년 우크라이나 대선에 나가려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키예프의 거리라면 꿈도 못 꿀 행동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키예프는 전시상황같다라고 물론 깜야녜쯔 빠돌스키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경험하면서 한 이야기다. 키에프도 우크라이나요. 깜야녜쯔 빠돌스키도 우크라이나다. 그러나 혼잡한 도시와 중소도시의 차이가 이런 것일까?

아무튼 저런 평화롭고 조화로운 모습의 도시라면 산소같은 느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 거리에서 그곳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는 몇 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이제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처음 출발할 때의 무작정 떠나는 걱정은 어느새 잊고 좋은 기억으로 충만한 여행은 끝났고 이제 해가 질 무렵이다. 다시 밤기차의 긴 여정은 다시 다짐하는 시간으로 나를 불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