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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카트만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by 김형효 2011. 8. 23.

 

상그릴라(SHANGRI-LA)의 땅, 네팔에서(26)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품고 있다. 그 기원이 윤택한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건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더러는 평화에 대한 간절함에 있는 듯도 하다. 기자와 함께 수웸부에 오른 사람들이 어떤 기원을 품었는지 모른다. 힌두교와 불교 사원이라는 이곳에서 그 기원을 얼마나 이룰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종교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봉우리에 있는 영역같다. 모자라게도 기자는 그 근방에서 번번히 되돌아선 경험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보낸 세월도 있고, 법당에서 절을 하며 무릎을 꿇고 기원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명상을 하며 홀로 방 안에서 그런 기원을 하기도 했다. 

 

 

수웸부 입구다. 대형 불상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평화롭다. 그들의 염원은 무엇일까? 몇몇 구걸하는 아이와 어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원숭이를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종교가 해결책이 아니고 사람이 해결책이라는 답을 얻었다. 물론 사람에게도 번번히 당하거나 트집을 잡히거나 모욕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끝끝내 난 사람이 나의 유일한 종교라는 인식에 다다르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종교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맡기는 스님이나 신부님이나 수녀님을 다른 차원의 살아있는 신성처럼 생각한다. 

그들이 얼마나 공덕이 있고 도량이 넓고 혜안이 깊은가 하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 아니다. 그들이 입은 옷 자체로도 기자가 범접할 수 없는 커다란 영역, 깊은 영역, 높은 봉우리에 가닿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자는 일행의 무사한 여행을 염원했다. 수웸부의 한 귀퉁이를 다 돌아보기도 전에 하늘에서는 가랑비나 보슬비처럼 비를 보냈다. 

러시아 여성인 발레리나다. 미소가 밝다. 옆 테이블에 네팔의 어린 아이와 사진을 찍을 것을 청했다. 네팔의 아이가 수줍어 하다 나중에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수웸부 한 켠에 레스토랑에서 찌아를 마시기로 했다. 그곳에서 러시아에서 여행 온 발레리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백발의 미인이었다. 흔히 말하는 백계 러시아인이다. 
세계적으로도 미모로 유명한 종족이다. 그는 기자의 서툰 러시아어 인사를 받고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와서 몇 차례 우크라이나 고려인과 통화를 한 것 말고는 러시아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서툰 인사와 영어를 섞어가며 간단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게 전부다. 

모든 것을 던진 사람처럼 홀로 여행을 떠나온 그가 부러웠다. 잠시 후 마냥 기다릴 수 없어 타고 온 택시기사와 통화를 하고 레스토랑과 가까운 곳에서 택시를 탔다. 카트만두의 중심인 더발 스퀘어를 향했다.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도 있었다. 장마(몬순)철에 카트만두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세차게 내리던 비가 금방 개기도 하고, 맑기만 하던 하늘이 구름을 몰고 와서는 장대비를 쏟아 붓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발 스퀘어는 옛날 왕궁이다. 사하(shah)왕조가 처음 네팔왕국을 통일하고 자리를 잡은 곳이다. 지금은 280년의 네팔왕조가 끝난 공화정을 펼치고 있으나 불안한 정치체제다.

더발 스퀘어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인 건물의 계단을 올라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새롭고 정겹게 느껴졌다. 비 오는 풍경은 카트만두의 붉고 찬란한 색채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더 깊어질래야 깊어질 것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신성의 땅이란 생각은 기자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4시 30분 전후면 기도의 종소리가 울린다. 그것은 소란스럽지 않은 여명이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멈추지 않는 기도는 생과 사의 사이까지 가득 메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카트만두는 그렇게 깨어나고 그렇게 잠든다. 카트만두에서는 우주도 세상도 그렇게 깨어나고 그렇게 잠들고 소멸하고 생성한다. 그것이 카트만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수웸부 정상에 있는 한 불상이다. 불상이던 수녀상이던 하느님이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손 모은 모습은 아름다운 것 같다. 우산 속 길가는 여성의 미소가 맑다.

우리는 그들의 가난과 그들의 미개함에 가련한 눈빛을 보낸다. 그들을 가엾이 여기며 말이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그런 우리의 눈빛에 의미를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미 신성의 영역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