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사는 세상/나의 여행기

티벳인들의 정신적 조국 그리고 고향, 머우다

by 김형효 2011. 8. 23.

 

상그릴라(SHANGRI-LA)의 땅, 네팔에서(27)

사흐 왕조 이전 카트만두의 주인이었던 네와리족들이 주요 명절이나 종교, 가족행사가 있을 때, 저 나뭇잎에 먹을거리를 장만해서 어우러져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네팔인들 중 가장 기도를 열심히 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이 기도하는 틈을 타 사흐왕조는 네팔을 지배했다.

사흐(Shah)왕조 280년을 함께 한 더발 스퀘어다. 10일간의 일정이 너무 짧다. 곧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이며 티벳인들이 1950년 10월 6일 중국의 침략을 받아 피난지로 선택한 네팔에서 네팔 정부의 도움을 받아 정착한 머우다란 곳이다. 

최근에는 망명한 티벳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며 그들에게는 신성한 이 지역에 힌두교가 또 다른 침략 세력처럼 파고들고 있다. 앞서 말한 수웸부와 이곳은 모두 기원이 불교사원으로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수웸부 나트, 머우다 나트라는 힌두교식 이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나트는 힌두교 사원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슬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더발 스퀘어에서 한 주민이 벼를 이용해 앉을 방석을 만들고 있다. 그의 태도가 묘한 인상을 풍긴다.

 

아무튼 중국 침략을 피해 망명지로 선택한 네팔에서 터를 잡고 정착한 머우다~! 어쩌면 티벳을 떠난 그들에게 정신적 고향, 혹은 조국으로 인식되고 있는 곳이다. 시간이 흘러 오후 5시 40분이 지났다. 짧은 여정에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조금은 버거운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꼭 보아야 하는 네팔의 모습이다. 

중국과 인도로 둘러싸인 네팔은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으로 인해서 종교까지 침투 혹은 압박적인 수단으로 네팔인과 티벳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듯하다. 보는 이의 마음이 안타깝다. 사실 네팔은 자력갱생이란 마을 떠올리기에 너무나도 취약한 조건을 타고났다. 

제3의 눈, 지혜의 샘, 붓다의 눈으로 불리는 이미지가 머우다의 상징이다. 이곳을 수많은 티벳인과 불교신자들이 끊임없는 발걸음을 이어가며 탑돌이하고 있다.

 

바다가 없는 네팔은 자국의 모든 생산물과 외국의 공산품도 많은 관세를 지불해가며 무역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세상으로 가는 길, 그들의 문은 인도와 중국의 선택에 의해 열리고 닫힌다. 종교와 삶, 그리고 현실을 생각하며 네팔을 본다. 숨이 막힌다. 이를 네팔 국민들은 어찌 받아들일까? 무력감이 팽배한 상황이다. 그러니 네팔 남부의 많은 영토를 인도에 내주고도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밤이 깊어오는 저물녘이다. 과거에 찾았을 때 오체투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티벳의 승려들이 라사를 향하여 가는 걸음을 보았을 것이다. 기자는 그 모습을 네팔에서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오체투지는 보이지 않았다.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머우다의 지혜의 샘, 제3의 눈이라 불리는 '붓다의 눈'을 바라보며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기자도 일행과 함께 걸었다. 

크리스나 쁘라싸이(54세,시인)집에 초대된 일행이다.

걸음을 멈추었을 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저녁식사에 초대한 크리스나 쁘라싸이(네팔 시인, 54세)의 집에는 예정보다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기자의 지인인 람 바하두르 타다(27세,네팔예술대 학생, 미술교사)와 김판용 시인, 성백선(신한은행 지점장), 기자와 혼인을 약속한 네팔 사가르마타 텔레비전 기자 먼주 구릉(Manju gurung, 37세)이 함께했다. 

처음 찾은 네팔,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서먹함보다 반갑고 즐거운 인상을 하며 주고받는 인사가 정겨움을 더하였다. 그렇게 네팔을 처음 찾은 손님들과 카트만두의 어둠을 즐겼다.